가는 날이 장날, 산책을 나선 날이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코끝이 시리고 뺨이 얼얼해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신발 끈을 잡아매었으니 반은 이룬 셈이다.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고속 터미널 5번 출구에서 우리는 만났다.
피천득 산책로를 시작으로 허밍웨이길을 지나 세빛 둥둥섬까지 한강을 따라 걷는 산책 길이다
지난가을 피천득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걸었던 길이다
그때처럼 고운 단풍은 자취도 없었지만 피천득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던 옛시조를 떠올려 본다.
다시는 피 선생님은 뵐 수 없지만 그가 닦아 놓은 수필의 길을 따라 걸을 수는 있다.
세월이 갈수록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될 것이고 단단해지리라.
피천득 선생님 동상 곁에 앉아 우리의 문운도 강건해지기를 선생님의 이름을 빌어 기원해 본다
새해 산책으로 피천득 길을 택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번 산책은 오롯이 걷기가 목적이다.
걷다가 지치면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는 카페는 참새 방앗간.
노을이 아름답다는 동작 노을 카페와
강물에 떠 있는 서울 아트센터 햇빛 샤워 스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산책 중에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카페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 산책은 즐거움이 두 배.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참새는 없다.
피천득 선생님을 기리다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동작 한강 대교 근처의 허밍웨이 길,
헤밍웨이 길이 아니다
허밍이 절로 나오는 즐거운 길이다
이 길을 벗어나면 동작 한강 공원의 자랑, 노을이 아름다운 노을 카페가 있다
한강을 배경으로 원통형으로 선 건물이다
꽁꽁 언몸을 따뜻한 차로 잠시 녹인다.
사방으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본다.
푸른빛이 하늘과 맞닿아 바다 못지않은 위용이다
겨울처럼 푸른 강물 빛이 어울리는 계절이 있을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명료함이다.
시리도록 푸르러서 아름다운 겨울
노을 카페의 안락함도 겨울 한강을 보려는 우리의 의지를 꺽지 못했다.
노을 카페를 떠나 세빛 둥둥섬을 향한다
아무도 없는 겨울 길을 지키는 건 나목 들이다.
간혹 남은 까치집이 있을 뿐 겨울나무는 발가벗은 가지 만이 남아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기세이다
겨울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나무들은 나무마다 개성이 있다
하늘을 향해 뻗은 기세도 모양도 방향도 각각 다르다.
나무의 아름다움에 취해 추위도 잠시 잊었건만 날씨가 춥기는 한가 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아직 얼지 못했지만 옆의 얕은 개천 물은 얼어 있다
얼음을 지치며 놀던 어린 시절 나를 만난다
시공을 초월하는 산책길이다
산책이 좋은 이유이다
기을에 보았던 강변을 운행하는 해치카는 자취를 볼 수 없다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성향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느새 세빛 둥둥 섬이 보인다
그럴 리는 없지만 조용하던 강가가 갑자기 시끄러워지는 듯하다
하얀 건물과 푸른빛이 감도는 원형 건물이 보이고 배들이 묶여 있다
눈으로 보는 소리였나 보다
눈과 귀가 조용한 강가 산책과는 다른 묘미가 있다
자연과 문명도 어우러져야 제 멋이다.
이제 두 번째 방앗간 스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언 손을 녹여줄 따스한 차 한 잔을 만나고 지친 몸을 쉬어 갈 수 있다
오랜만에 찾는 고향 길에서 동구밖 정자나무를 발견한 기분이다.
이젠 피천득길에서 허밍웨이 길을 지나 세빛 둥둥 섬까지 일만 오천 보의 산책을 마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