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 어느 겨울 날,
여수 오동도를 지나다가 동백을 본 적이 있다.
제법 시건방기가 들어 웬만한 감정 조절쯤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정서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자부했었다.
사춘기의 호들갑이 한참 유치하게 느껴지고
성숙한 내면을 갖추리라 하루에도 몇 번쯤 다짐을 내리던 시절,
진초록 나뭇잎에 보석처럼 박힌 붉은 동백을 보며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었다
진저리 나는 보색대비
처음 동백을 접하였으니 그 신묘한 색의 조합이 더 놀라웠고
강하게 뇌리에 박혔다.
한동안은 그 붉은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진초록과 흰 잔설 틈에 붉은 한 떨기 꽃잎,
그 붉은 충격은 색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로 아직도 남아 있다
한참을 지나 삶의 무게가 버겁던 때
세상의 즐거움은 나와 관련이 없고 당면한 문제들만이 어깨를 누르던 시절
떠밀려 타고 내리던 지하철에서 내려 가파른 계단을 로봇처럼 오를 때
한 소녀가 입었던 핑크색 주름치마
찰랑거리는 주름과 더불어 눈에 빨려 들던 경쾌한 핑크색
천지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사는 즐거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쁨이란 게, 즐거움이란 게, 삶이란 게, 그리 특별한 건 아니다
우연히 만난 분홍치마가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고 삶의 이유 일수 있었다
빨강이나 핑크를 좋아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시절,
오히려 그런 화려함을 유치 함으로 치부해 버리려던 시절에
내게 다가온 두 가지 색
지나간 추억처럼 그리 흐뭇하기는 하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색 일수는 없다.
나는 요즘 하늘색과 사랑에 빠져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색의 조화에 넋을 놓고 있다
농도와 채도에 따라 무궁무진 변하는 푸른빛의 향연
그 오묘함에 찬사를 쏟지만
지난봄 내 마음을 흔들던 초록들도 잊을 수 없다
연하디 연한 연둣빛에서 날로 색을 더하여 지쳐 버린 검은빛의 진초록까지
생명의 강인함을 내게 일깨워 주었었다.
각종 꽃에서 쏟아지는 예쁜 꽃색에선 어떤 걸 꼬집어 낼 수 있겠는가
각양각색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데..
온 세상의 추함을 뒤덮은 흰 눈, 순백의 흰색
그 숭고한 아름다움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 색이 된다
모두룰 포용하는 힘, 검은 색이다
그러니 내게 묻지 마라,
내가 좋아하는 색은 그때 그때 다르다.
고유의 아름다운 색 그대로를 사랑한다
내 사고의 틀에 색의 아름다움을 가두어 두진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