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하의 여름 저녁

by 우선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초여름 저녁을 좋아한다. 달아오르던 태양의 열기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스르르 기운을 잃고 산들산들 바람이 골목 어귀에서부터 불어온다. 불타오르던 정열이 부끄러운 듯 하늘은 갓 시집온 새색시 뺨처럼 붉다. 더위에 지쳐 잠시 생기를 잃었던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골목으로 모여든다. 집집마다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조금 있으면 팔소매를 걷어 올린 가장들이 어깨에 겉옷을 걸치고 골목에 나타날 것이다. 골목엔 다시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들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동화의 한 장면 같은 내가 그리는 초하의 여름 저녁이다. 모두가 귀가를 서두르는 그 시간이 좋다.

때가 되면 회귀하는 연어처럼, 해가 지면 나는 귀가를 서두른다. 어린 시절처럼 강요하는 사람도 없건만 어둠이 내리면 안절부절 마음이 조급해진다. "집에 엿 숨겼어?" 딴지를 거는 친구들도 개의치 않을 만큼 귀가 의지는 확고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들었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밤 풍경 때문일 수도 있다. 도깨비불이 나르고 여우 울음소리가 들렸으며 은혜 갚는 호랑이도 있었지만 '내 다리 내놔' 하고 쫓아오던 귀신이 제일 무서웠다. ' 겨우 인삼 뿌리일 뿐이잖아' 할 수 있으니 성인이 된 후의 귀소 본능을 설명할 수는 없다 "가스라이팅이야' '청소년 여러분,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사랑의 종소리를 듣고 자랐잖아' 해보지만 역시 설득력은 약하다. 밤거리로 나를 유혹하는 친구도 역시 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밤만 되면 올빼미처럼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휘황찬란한 밤의 불빛에 열광한다. "낮보다 환해, 뭐가 걱정이야 "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채근하며 길어진 하루를 자랑한다. 잠시 부럽기는 하다. 그 앞에 놓인 시간이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내게 원천봉쇄된 그 시간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 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그게 침대 안에서의 일일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역시 밤마실은 득보다는 실일 수도 있겠다.

내 귀소본능은 그런 계산에서 나온 건 물론 아니다. 밤은 잘못 발을 디뎌 속수무책 빠져드는 늪 쪽에 더 가깝다. 빠져나오고 싶지만 무언지 모를 힘이 나를 잡아당긴다.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치기보다는 견디는 쪽을 택한다. 결국 다시 새벽이 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밤이 늪 같다면 새벽은 옹달샘이다. 날마다 새롭게 퐁퐁 솟아오른다. 지나 온 하루분의 일과가 여과되는 늪을 지나 새로운 새벽을 맞는다.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내게 밤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여인처럼 하루를 관조해 보는 시간, 때로는 아픈 반성이 따를 수도 있다. 귀가를 서두르지만 기껍지는 않다. 누군가 내 뒤꼭지를 잡아 당기기는 것도 같다. 그 시간이 길어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초하의 여름 저녁은 내가 누릴 수 있는 밤이 오기 전 시간이 가장 길다. 그 선선하고 평화로운 시간, 내가 그리는 펼화로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