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봉은사 앓이를 한다. 부처님 오신 날같이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교 신자도 아니니 좀 생뚱맞아 보이기도 한다. 단순한 관광이라면 해마다 겪는''홍매화 앓이'라고 하기엔 앞뒤가 안 맞는 것도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봉은사 홍매화 앓이'라고 해야겠다. 해마다 꽃구경을 가는 여심이라면 '앓이'라 지칭해도 과하지 않게 봐줄 수 있을 것도 같다.
강남에서는 선정릉에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다음 차례는 봉은사 홍매화이다. 이제나저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홍매화 소식을 기다린다. 마음만 앞서던 어느 해에는 서너 번 봉은사 출입을 한 후에야 겨우 새침하게 다물어버린 봉우리를 발견한 적도 있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피기까지 일주일 이상 걸렸으니 홍매화 사랑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 틀림없다. '홍매화 앓이'라 할만하다
이젠 이력이 붙어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안다. 올해 첫 방문은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터지는 사춘기 소녀들처럼 꽃송이들이 다투어 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닷새가 지난 오늘은 원숙한 여인의 농염한 자태를 보는 듯하다. 단아한 자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홍빛은 경계를 넘나들 듯 아슬아슬하기도 하다. 세속과 비속, 정갏마과 요염함이 한 나무에 공존한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감탄사와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오가는 이의 발걸음을 한 번 더 잡아 묶는다. 잔치에는 구경꾼이 있기 마련이다. 꽃잔치에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이 곧 신심이 아닐까? 아름다움을 보는 아름다운 사람들,그 마음은 오늘 불심으로 피어난다. 부처님 앞에서 경건해진다.
홍매화로 달아오른 여심은 명상길로 다스린다. 봉은사를 언덕처럼 둘러싸고 있는 봉은사 명상길은 흙길이다. 도심에서 흙길, 야산을 걷는 듯 높낮이가 있는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도심의 산책로는 대부분 잘 닦인 포장도로이다. 걷기엔 편할지 몰라도 걷는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는 없다. 마치 가공식품을 먹는 듯하다. 이곳에서는 봉은사 건물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한옥 지붕의 유려한 곡선을 내려다보는 풍광은 흔하게 볼 수 없는 값진 풍광이다. 명상길에서 대나무 숲을 지나고 솔밭 길을 지나고 이따금 기와지붕도 보고 언뜻언뜻 홍매화 붉은빛이 지나가기도 한다. 홍매화는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에서 보아도 예쁘다. 해마다 이맘때면 홍매화 앓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