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쉽고 많은 말 사이에서 정작 예쁜 것 침묵이라고 다시 말하는 일.
'좋은 취향'이라는 말에는 힘이 있어도, 취향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판단할 가치가 있거나 호불호를 나눌 문제도 아니다. 사전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어떻게 하고 싶은 경향 자체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나? 정색하고 비판할 수 있나? 예를 들면 이런 경우?
"저는 권력형 비리를 계획하고 저지르는 취향이 있어서요." "저는 전쟁광이라서요."
명백하게 궤가 다른 얘기다. 하지만 뭔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것이, 되도록 남들보다 빨리 아는 것이 실력 혹은 능력으로 여겨지는 세계도 있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선 취향이라는 말에 힘이 실릴 수 있다. 그 앞에 '좋은'이라는 단어가 의뭉스럽게 생략돼 있다 해도.
90년대만 해도 기자 지망생 대다수는 문화부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때가 문화부의 중흥기였다. 스타 기자도 많았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현실이라서, 이젠 그냥 옛날 얘기가 됐다. 지금은 누구나 문화를 말할 수 있어서다. 평론이 기자의 특권도 아니다.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당신you'을 선정했던 이미 2006년이었다. 인터넷에 정보를 올리고 공유하는 당신, 개개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른바 디지털 민주주의의 수혜자인 당신, '네티즌'이라는 모호한 말로 묶을 수 있는 당신. 정확히 하자면 결국 우리 모두. 현상은 이미 그때 굳어져 있었다.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잣대를 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판의 절대 강자가 결국 훈수꾼인 것처럼, 그저 말을 섞기엔 문화가 쉽다. 따라서 그 언저리가 가장 번창했다. 감상에 따라, 주관에 따라, 나름의 기준에 따라 뭐가 어떻다고 말하는 데 문화는 열려있으니까. 소셜 미디어는 광활하고 유용하면서도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세계로서, 모두에게 무한으로 열려있다. 거기서 댓글보다 생생하게 교차하는 말들, 오해들, 공격과 방어, 결국은 불통에 근접한 세력과 세력의 다툼들. 대부분 사소하지만, 당황스러워 피하기보다 생생해서 기억해두고 싶은 말들의 전장을 매일 본다.
거기선 ‘구리다’는 말이 제일 쉽다. 혹은 그와 유사하게 상대를 깎아내릴 수 있는 수많은 단어들. 누가 신곡을 발표했는데 별로다, 누가 옷을 어떻게 입었는데 추하다, 누가 그 영화 별로랬는데 난 좋더라, 그러니까 걔가 별로다. 뭐 이런 흐름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들. 그 대상이 일단의 영향력을 확보한 사람일 때, 말과 말의 일방적인 충돌은 극에 달한다. 시비 말고 다른 맥락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 그걸 다 받아넘기면서 비아냥대는 또 다른 말들, 듣고 보기엔 너무 많아서 피로한 그 말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닌 그 말들. 깔린 멍석에서 뭘 하고 놀든 누가 상관할 바야 아니지마는, 그런 비난과 비아냥의 향연을 가만 보고 있는 게 정신적으로 피로하다고 어디 가서 가만히 속삭이고 싶은 마음 정도는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어떤 기획사에서 작곡자이자 보컬트레이너,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한 후배는 연습생에게 이런 조언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너 정말 노래가 하고 싶은 거니?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 거야, 앞으로.” 당연한 얘기라도 열일곱 살 먹은, 동생 같은 예쁜 여자애한테는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 여자애는 ‘헤헷’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괜찮아요, 방송 한 번만 나오면 된다고 생각해요. 일단 유명해지기만 하면, 그 후엔 뭘 해도 되니까요. 하다못해 쇼핑몰이라도.” 쇼핑몰이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게 자명하다 해도, 일단 이 예쁜 여자애가 시류를 제대로 읽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유명해지고 싶으면 책을 내라는 책이 정색하고 팔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언로는 열렸지만 언론은 추락했다. 한국의 언론자유도는 세계 70위다. 2015년에는 60위였다. 1년만에 10계단 하락했다. 종이 신문과 인쇄 매체의 종말은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여겨지는 와중, 포털사이트에 걸리는 몇몇 기사들을 보면서 ‘프로페셔널’에게 능히 기대할 수 있는 격을 바라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한 홍보 대행사에서 관리하는 언론사 리스트는 2백 군데가 넘는다.
어젯밤에 TV에서 누가 했던 말, 트위터에 누가 올린 말, 페이스북에 누가 올린 사진을 지상 중계하는 기사들이 차고 넘치는 시대. 기사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처럼 순진한 일도 없어 보이는 나라. 유명한 누구를 공격한 다른 누구의 얼굴이 삽시간에 유명해지는 아이러니. 유명세가 곧 돈이려니 생각하는 상스러움. 공인된 말의 권력과 영향력은 바닥을 쳤고, 범람하는 건 이미 영향력이 있거나 그걸 갈구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소통은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추구하는 말 같고, 불통은 그냥 현상이다.
그래도 좋은 것들, 무릎을 탁 치도록 똑똑한 소리들, 의심의 여지없이 탁월한 것들이 여전히 누군가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손 위에 올려놓기만 해도 마음이 다 차분해지는 돌 한 덩이, 엉덩이만 살짝 걸쳐 봐도 역사가 다 느껴지는 1인용 의자 같은 게 좋다면 뒷짐 진 한량이라고 욕을 한 바가지 푸지게 먹으려나?
물건이든 음률이든 말이든 마음이든, 정말 좋은 것들은 원래부터 숨어있었다.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그걸 찾아서 음미하는 일. 대책 없이 ‘구리다’는 말보단 그저 좋으니까 좋다고 담백하게 말하는 일을 유기하진 못한다. 그 과정이 소란할 리 없다. 그러니 정작 필요한 건 침묵이 아닐까, 라고 또 말을 보태는 허무.
글/ 정우성 (<에스콰이어> 피처에디터)
** 2012년 7월에 쓴 것을 살짝 고쳐 옮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