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일.
나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재난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있고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있지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사건을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어서 보고 나면 생각이 천천히 정돈된다. 다큐멘터리 역시 극영화처럼 구성이 들어가고 연출이 들어가지만, 비교적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체험하고 현장감을 느낄 수 있어서 보고 나면 감각이 조금씩 정화된다. 대학 시절에 봤던 박기복 감독의 <영매>는 지금 생각해도 선명하고 강렬하다. 군인 시절에 봤던 지아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는 지금 생각해도 어둡고 무섭다. 요 며칠 다큐 제작에 흥미를 느껴, 양희 작가의 인터뷰집 <다큐하는 마음>을 오랜만에 읽어봤다.
작가가 인터뷰한 이들은 총 10명이다. 모두 다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다큐로 밥을 먹고 다큐로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이다. 감병석은 프로듀서이고, 강유가람과 박영이는 감독이다. 김형남은 편집감독이고 안재민은 촬영감독이다. 이승민은 비평가이며 조계영은 홍보마케터이다. 주희는 수입배급자이고 변성찬과 최민아는 영화제 스태프이다. 10명의 직업은 모두 이 책이 발간된 2020년 9월 기준의 것이다. 다큐 제작 환경이 녹록치 않고, 이것저것 다 해야 하는 게 다큐 제작이다보니 2022년 8월에는 본업이 바뀌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굳이 이 10명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책에 있는 그때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
감병석 프로듀서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거리의 사제'로 불리는 도시빈민운동가 박문수 신부가 그의 스승이었다. 그는 도시빈민운동을 통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을 봤다." 감병석 프로듀서는 다큐멘터리가 하고 싶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매일 목격하는데, 뉴스엔 나오지 않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죠. 철거 현장에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다치고 울고 그러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TV 뉴스에 그런 얘기는 안 나와요. 이 세상에 분명히 있는데 없는 거죠. 그래서 다큐멘터리가 하고 싶었어요. 다큐멘터리라면 현장에서 내가 본 것을 그대로 담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보이는 것들 너머의 이야기, 그게 중요했다.
김형남 편집감독은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편집 작업이 순탄치만은 않아 "사실 누군가 다큐 편집감독을 하고 싶다고 하면 오히려 말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면서도, 편집감독을 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이런 충고도 한다. "그래도 꼭 해보고 싶다면 무엇보다 많이 편집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 편집본을 보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 해보는 것도 꼭 필요해요. 특히 편집본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요. 정답은 하나가 아니거든요." 나는 여기서 장인의 마음과 조직의 마음을 생각했다. 개인이 끝까지 밀고 나가는 마음 못지 않게, 조직이 끝까지 함께 풀어 나가려는 마음이 정말 중요하다.
이 책에는 <칠곡 가시나들>을 연출한 김재환 감독의 성명서 일부도 수록되어있는데, 나는 이 글을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성명서가 힘차게 울리는 현장을 생각하며 한번 읽어보자. "업계에서 가장 힘센 자가 최소한의 금도를 지키지 않고 돈만 좇을 땐, 교만의 뿔을 꺾어 힘을 분산시킬 룰을 만들어야 합니다. 투자 배급과 극장의 고리를 법으로 끊어주면 좋겠지만 CJ를 사랑하는 국회의원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CJ가 정한 모욕적인 룰은 거부합니다. 우리 영화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겠습니다." 그래, 그런 거 같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그게 다큐하는 마음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