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람들의 고난, 직장인들의 고통.
구약 <욥기>의 1장 1절을 이렇게 바꿔본다. 태평양 어딘가에 흰 고래 한마리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모비딕 Moby-Dick 이었다. 그는 거대하고 강렬하여 거칠 게 하나 없는, 인간을 벌벌떨게 만드는 위엄있는 고래였다. <모비딕>은 바로 이 맹렬하고 엄숙한 고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포경선 피쿼드호 Pequod號 를 탄, 난폭한 바다에 몸을 던진 뱃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번에 읽은 판본은 크리스토프 샤부테가 각색하고 그린, 이현희 선생이 옮기고 문학동네에서 2019년에 펴낸 '허먼 멜빌 탄생 200주년 기념' 그래픽노블이다.
스타벅 Starbuck 은 피쿼드호의 1등 항해사이다. 스타벅은 신중하고 냉정하며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가 배에 탄 목적은 돈이며, 고래를 많이 잡아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게 그의 꿈이다. 그는 고래잡이 경험이 많고, 무엇보다 고래를 두려워할 줄 안다. 그는 피쿼드호의 선장과 요동치는 파도처럼 갈등한다. 고래를 잡아 기름을 얻어 선원들과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야하는데, 선장의 신경은 다른 곳에 멈춰있다. 선장을 설득도 해보고 선장에게 대들기도 하지만, 끝내 선장의 명령을 따른다. 배는 산산이 부서지고, 그도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에이해브 Ahab 는 선장이다. 에이해브는 분노와 증오에 가득찬 사람이다. 그가 승선한 목적은 복수이며, 그의 오른쪽 다리를 물어뜯은 흰 고래를 제 손으로 때려잡는게 유일한 꿈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그놈을 끝까지 추격할 것이다. 그놈이 시꺼먼 피를 토할 때까지!" 그는 선원들에게 술을 따르며 말한다. "마시고 맹세하라! 모비딕을 죽여라!" 그는 마침내 모비딕과 만났고, 스타벅에게 배를 맡기며 모비딕에게 뛰어든다. "스타벅, 한번 항구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배가 있는 법이네. 나는 늙었네. 여보게, 우리 악수나 나누세."
이슈메일 Ishmael 은 선원으로 피쿼드호에 올라탔다. 이슈메일은 스타벅과 에이해브같은 뱃사람이 아니다. 그는 "고래잡이가 어떤 건지 알고" 싶어서, 또 "세상을 보고" 싶어서 바다로 갔다. 사실 그의 이름도 정확하지 않다. 승선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이슈메일이라 올리기는 했지만, 그의 정확한 이름이 무엇인지는 뱃사람들도 그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는 뱃사람 답지 않게 넋 놓고 있을 때가 많다. 어쩌면 이 몽상이, 그를 난파선의 유일한 생존자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슈메일은 홀로 살아남았고, 이 이야기를 차분하게 말한다.
<모비딕> 에필로그의 첫 문장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당신께 아뢰러 왔나이다"는, <욥기>의 1장에서 4번이나 나오는 표현이다. 에이해브 Ahab 와 이슈메일 Ishmael 은 각각 구약 <열왕기>와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욥기>는 영어로 'The Book of Job' 이고, 'Job' 은 '히브리의 족장'이자 '하나님의 시련을 견뎌낸 정의로운 사람'을 일컫는다. 신앙이 없고 <욥기>를 문학으로 읽는 나는, 'Job' 을 내게 익숙한 '일', '직업'으로 한정해 <모비딕>을 다시 읽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잔혹한 일터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
<욥기>를 읽으며 <모비딕>을 생각한 구절 2개를 옮긴다.
7장 12절 "내가 바다나 아니면 고래라서 주께서 나를 감시하시나이까?"
9장 17절 "그분이 폭풍으로 나를 부수시고 까닭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