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극단의 시대.
윤이상이 프랑스 파리로 홀로 유학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있은 지 3년이 지난 1956년 6월 2일이었다. 열 살 아래인 부인 이수자는 일곱 살 딸 윤정과 세 살 아들 윤우경과 한국에 남았다. 서울에서 윤이상이 “뚫고 들어갈 직장”은 사실 없었고, 그의 처지는 옹색하고 서러웠다. 해방이 된 지 11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악계(樂界)를 하늘처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가장 잘난 것처럼”(p.95) 뽐내었다.
파리에서 윤이상은 욕심이 많았다. 어학도 빨리 끝내고 싶었고, 음악 이론도 공부하고 싶었고, “작품도 몇 개씩을”(p.37) 쓰고 싶었다. 그러나 윤이상의 처지는 여전히 곤궁했다. 이수자가 보내주는 유학비용은 자주 떨어졌고, “밥을 굶을 때가 여러 번”(p.229) 있었다. 고생만 실컷 하다가 소득 없이 귀국해서 강가의 어부가 되는 건 아닌 지 불안해했다. 야망을 품고 파리로 왔지만, 그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가난한 나라의 유학생이었다.
1957년에 윤이상은 독일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다. 파리보다 학비가 덜 들었고, 교수는 꼼꼼하게 지도했다. “독일에 온 후부터 국제무대에도” 자신의 “작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p.100)했다. 자신감이 있었지만 윤이상은 계속 불안했고, 그럴수록 더욱 부인에게 매달렸다. 이수자가 한국에서 빈틈없이 살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믿었으며, 그녀가 보내는 편지가 하루만 늦어도 “더 기다릴 수 없을 만치 초조”(p.97)했다.
이듬해, 윤이상은 자신감이 생겼다. 공부는 궤도에 올랐고, 그가 “바라보는, 정복하려는 대해(大海)가 그리 멀지 않고 끝장이 보이는 듯”(p.129)했다. 그가 작곡한 <현악사중주 1번>이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초연됐고,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 강습회에 장학금을 받고 참석했다. 친구들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윤이상은 여전히 불안했다. 1958년 10월 20일에 그가 이수자에게 부친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벌써 내가 온 지 만 3년이 닥쳐오는구려. 나는 때때로 생각해보오. 당신이나 아이들에게 고적감을 주면서 내가 오랫동안 이 외국에 머무를 가치가 있는가? 나의 외유에는 세 생명이 부자유를 무릅쓰고 기다리고 있지 아니한가?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남기려고 하는가? 오선지 상에 한결같이 콩나물을 그리면서, 이것은 조금도 인간의 배를 채울 수도 없는 것이며 기계화되지도 않을 것. 이것 때문에 자신도 괴롭고 가족도 괴롭히고.”(p.169)
유학을 떠난 지 3년이 된 1959년, 윤이상은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다름슈타트에서 그의 곡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인정을 받았다. 불안은 옅어졌고, 파리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추억삼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때가 오리라”(p.203) 기대했고, “순수 작곡만 가지고도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멸시받고 하대받던 윤이상은 “약소민족의 시점에서 승리감 비슷한 것을”(p.235) 갖게 되었다.
1960년이 되자, 윤이상은 가족과 함께 독일에서 살아갈 궁리를 하게 된다. 자신의 성취를 이수자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딸과 아들을 그들의 기질대로 자유롭게 공부시키고 싶었다. 이수자에게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었고, 딸과 아들은 그들의 조부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쓸데없는 인간”(p.288)으로 내던져 두고 싶지 않았다. 1961년 9월 20일, 윤이상은 유학을 떠난 지 5년 만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마침내 이수자를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작곡가로 평가 받는 인물이지만, 윤이상 역시 시대의 한계와 속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약소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전쟁과 가난을 겪었다. 폭력적인 부친을 내내 원망했지만, 부인을 야단치고 딸아이를 다그치던 남자였다. 윤이상이 1956년부터 1961년까지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은, ‘극단의 시대’였던 20세기를 꽉 채우고 살다간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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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3일은 그의 30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