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의 증인 임대운 林大雲.
1980년 '5월 광주'를 목격한 또 다른 증인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돌린저 David Lee Dolinger 이며, 1978년부터 전라남도 영암의 한 보건소에서 평화봉사단 활동을 했던 미국 태생의 남성이다. 펜실베이니아주 런던 그로브 시골 마을에서 자랐고, 퀘이커교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후 대학에서 화학과 생물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 상태"였을 때, "나 자신을 찾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평화봉사단에 합류했다.
1978년 4월 21일, 데이비드는 생에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그는 한국에 45번째로 파견된 평화봉사단 K-45 멤버 가운데 한 명이었고, 실무 배치 전에 평화봉사단 본부가 주관한 한국어, 한국문화, 보건의학 등의 교육을 충북 청주에서 받았다. 한국어교육 담당자 가운데 한 명인 임동욱 선생은 그에게 '임대운 林大雲 '이라는 한국 이름을 주었고, 그는 "그날부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데이비드보다는 '임대운'이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교육을 마친 임대운은 전남 영암으로 배치되었고, 78년 7월부터 결핵환자를 돌보는 일을 한다.
임대운은 "보건소 일을 배우는 데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주말에는 동료들과 월출산을 오르내리거나 산 속 작은 사찰에서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따금씩 전남 도청이 있는 광주에 나가 평화봉사단 단원들을 만났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한국 정치와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고, 마침내 그리고 운명적으로 '5월 광주'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갈등했다. 광주 시민들을 돕는 것이 평화봉사단 서약을 위반하는 것인지 동료들과 논의했다. 임대운과 동료들은 "이곳에 남아 증인이 되어야 하며,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다"고 결심했다.
임대운은 '5월 광주'의 처음과 끝을 목격했다. 5월 18일에는 공수부대가 진압봉으로 시민들을 가격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5월 24일에는 전남도청에서 시민군 윤상원을 만났다. 5월 27일 새벽 3시에는 전옥주의 음성을 들었고, 당일 오전에는 도청에 쓰러져있는 시민군들의 참상을 직접 보았다. 그가 내린 '광주항쟁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5.18 기간에 시민들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 시민들은 헬기에서 사격을 받았으며, (…) 시민들은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자녀, 앞으로 태어날 후손의 미래 그리고 한국의 미래를 위해 죽었다."
이 책의 '저자의 말'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난날 내 자신과 한 약속과 달리, 이 책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는 분명히 설명하기 어렵다." 본문 마지막 챕터 '광주항쟁에 대한 내 결론'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광주항쟁 때 나는 이전의 나를 묻었다. 그리고 1980년 5월에 내가 목격한 사건 때문에 또 다른 나의 일부가 태어났다. 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을 더 돕지 못한 후회는 죽는 날까지 남을 것이다. 광주 시민들과 희생자들에게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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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附記
1. 임대운은 '5월 광주'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생물학, 면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이후 지난 35년간 감염병을 진단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해왔다.
3. 그는 "죽게 되면 광주 또는 자신이 근무했던 영암의 월출산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한다.
4. 그는 '5월 광주'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1980년 5월의 가장 좋은 기억 중 하나는 내가 실질적으로 광주 시민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5. 임대운 선생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리며, 직접 뵐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