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 사회, 언어.
정독이 쉬운 책은 아니었다. 내가 뇌과학 분야의 독서가 짧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고, 그로 인해 이쪽 용어들이 낯설었던 게 두 번째 까닭이겠으며, 번역투 문체가 매끄럽지 않았다는 게 또 한 가지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번역투 문체는 내가 어찌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일테고, 앞의 2가지 문제는 나 스스로 국내 뇌과학 전문가들이 쓴 책을 자주 읽는 것으로 조금은 보완할 수 있겠다. 이 책 <운명의 과학>을 다시 읽게 될 지는 모르겠으나, 일독 시 인상 깊었던 문장 몇 가지를 옮기고 그 느낌을 적는 것으로 미약하나마 갈무리를 해본다.
먼저 기억에 남은 문장은 '연구'에 대한 작가 한나 크리츨로우의 태도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마치 보석을 조명에 이렇게도 비춰 보고 저렇게도 비춰 보는 것처럼, 행동을 사방에서 다각도로 바라보며 연구해야만 그 온전한 자아가" 드러난다. 또한 "분야가 무엇이든 모든 과학 연구의 결론은 잠정적이며 그 연구를 진행한 사람의 제약과 인지적 편향이 좌우된다." 본받을 만한 삶의 태도이다. 꼭 연구가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물을 이런 방식으로 대하면 그들을 향한 편견과 혐오가 줄어들 것이다. 요즘 흔히 말하는 '확증편향'도 줄어들테고.
이 책에서 가장 강렬했던 문장은 2장 '발달 중인 뇌' 59쪽 두 번째 단락에 묘사된 다음 표현이다. "결핍된 환경에서 자라다 보면 사람들은 장기적 보상보다는 단기적 보상을 선택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맹자의 모친께서 세 번이나 이사를 하며 교육환경을 바꾼 건, 앞선 주변 여건들이 아들에게 결코 좋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냈던 세대들은, 먹을 게 생기면 어떻게든 먹어두라는 말을 그들의 자식들에게 했을 것이다. 원칙이 무너진 사회에서 살아가면, 누구나가 편법이나 잇속만을 좇을 것이다.
'결핍된 환경'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자신의 독서량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누군가가 말하면 대개 '나도 그 책 읽어봤다'는 말을 하거나 아니면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못한다. 자신의 학력 또는 학벌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학력이나 학벌이 높다고 생각하면 으레 움츠러들거나 아니면 자기가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묻지도 않았는데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그리고 이런 열등감을 털어내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 그야말로 사달이 난다.
나는 이 세상이 '자연', '인간', '언어' 등 3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말 그대로 원래 그러한 것, 인간의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있는 것들이다. '인간'은 문자 그대로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이다. '언어'는 인간들이 하는 이야기, 이 이야기가 만들어낸 문화, 제도, 양식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언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형태일 수도 있고, 개인이 사회에서 배우거나 반성의 결과로 나타난 표현일 수도 있다. 언어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언어가 고상하려면 사회가 고상해야하나? 언어가 저급하다면 사회가 저급해서인가? 답하기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