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없이 자랄 것 같아 걱정된다면....?
어느 사람이든 자신의 인생 철학이 있다. 엄마와 아빠의 철학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아이를 키우는 데에 큰 갈등이 생길 일은 잘 없는 것 같다. 물론, 엄마와 아빠의 인생 철학이 크게 다르다면, 아이를 두고 큰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철학이 다른 두 사람이 결혼은 어떻게 한 건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건 뭐 딴 얘기고. 언젠가는 큰 갈등이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을 것이다. 어린이가 자신의 철학을 어떻게 정립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여섯 살인 어린이는 아직까지는 양육자의 이야기를 수용해 준다. 진심으로 납득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도 사회적 생물이고, 우리 양육자도 사회적 생물이기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에는 소소하게 그런 갈등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가 인근에 있는 쇼핑몰에 간 날이었다. 아이가 다섯 살 때였나? 그랬다. 할머니와 이모는 그동안에도 우리 아이에 대한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모에게는 (당시엔) 하나뿐인 조카였고, 할머니에게도 큰딸에게서 난 하나뿐인 손녀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문제는 우리 아이가 그런 메커니즘을 아주 영리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할머니와 이모는 항상 내가 사 달라는 것을 사 주는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날도 어린이는 쇼핑몰에 가자마자 보이는 것마다 ‘나 저거 살래!’를 외쳤다. 이모와 할머니는 진지하게 살 것들을 고르고 있었고, 아주 비싸 보이는 반짝이 드레스를 아이의 몸에 사이즈를 대 보기 시작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만 데리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시무룩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좀 설득을 할 필요가 있었다.
“까꿍아, 지난주에도 할머니가 까꿍이 드레스 사 오셨지? 이모는 장난감도 얼마 전에 선물해 주셨잖아. 그렇지?”
“…….”
“이모랑 할머니는 까꿍이를 사랑하니까, 까꿍이가 사 달라는 거랑 갖고 싶다는 거 다 사 주려고 하시잖아. 그렇다고 매번 막 사 달라고 조르면 안 돼. 집에 장난감도 옷도 너무 많잖아.”
“왜? 갖고 싶단 말이야!”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질 수는 없어. 물건을 자꾸 만들고 자꾸 사고 자꾸 버리면 지구가 아플 거 아냐. 지구가 아픈 얘기는 어린이집에서도 들었지?”
“그래도 갖고 싶은데…….”
‘어린이집에서 배웠던 것’을 근거로 삼으면 아이는 항상 한풀이 꺾인다. 어떻게 가르치셨길래? 가끔 아이와 말싸움을 할 때마다 선생님들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나는 살짝 누그러진 아이에게 물건의 소중함을 와닿게 해야겠다 싶었다. 감성적인 터치를 좀 더해서.
“까꿍이 얼마 전에 「토이 스토리」 봤지? 장난감들한테도 마음이 다 있잖아. 집에 있는 장난감들 안 가지고 놀면 서운해한다고. 옷들도 집에 너무 많아서 옷장에 다 안 들어가고 나와 있는데, 안 입어주면 옷들도 서운해해.”
“…….”
아이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다. 저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안 돼! 옷 그만 사!’ 하고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목소리를 좀 높였던 것이 후회스럽다. 찬찬히 설득했으면 되는데, 왜 나는 항상 이렇게 욱 하고 화를 내고 마는 것인가.
“아빠는 이 차를 좋아하거든. 왜인 줄 알아? 이 차는 까꿍이 태어나고서 샀는데, 까꿍이 아기 때 잠 안 잘 때마다 데리고 나와서 동네를 다녔어. 그러면 까꿍이는 옹알옹알 노래하다가 잠들었지. 우리 같이 이 차 타고 에버랜드도 가고…….”
“레고랜드도 갔잖아!”
“그래 맞아. 여기저기 진짜 많이 놀러 갔지? 물건에는 이야기랑 추억이 쌓이잖아. 그래서 아빠는 이 차를 좋아해.”
아이는 우리 세대가 겪었던 것만큼 ‘충분한 결핍’을 겪지 못하는 세대가 될 것이다. 성장한 이후에 겪어야 할 결핍은 우리 세대가 가졌던 것보다 클 수도 있다.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가 더 가속화될 테고, 경제적으로도 더 성장하지 않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런데 유년기에 그런 잔혹한 미래에 대비한 백신을 맞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어른이 되어서 처음 맞닥뜨린 결핍이 뛰어넘기 어려운 벽처럼 느껴지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것이다. 유난스러운 걱정일까? 부디 유난이었으면 좋겠다.
“또!”
“응? 또?”
“또, 또 말해 봐. 뭐가 좋은지.”
이야기하다 보니, 좋았던 예전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면서, ‘행복 기억 배틀’처럼 대화의 주제가 변했다. 아이의 시간 관념과 어른의 시간 관념이 조금 달라서인지, 까꿍이는 내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처럼 들으며 아주 즐거워했다. 다 자신의 더 어릴 적에 관한 이야기인데.
“아빠는 우리 집 발코니도 좋아해. 까꿍이 바깥 보는 거 좋아해서. 안 자고 울면 발코니에 나가서 노래 불러 주면 잠들었거든. 바깥을 얼마나 열심히 쳐다봤는데……. 까꿍이 뭐 좋았어?”
“나는 병원에서 계란 먹은 날, 아빠랑 피자 먹으러 가서 좋았어.”
“어? 그렇구나. 좋았어? 그날이?”
아이는 달걀 알레르기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간 날을 이야기했다. 너무 소소해서 잊고 있던 날의 이야기를 꺼내서 놀랐다. 나도 몰랐던 즐거움을, 의도하지 않았던 즐거움을 소중하게 가지고 있어 주니 고맙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이럴 때는 아차 하며 나의 부족함과 편협함을 깨닫게 된다. 아이의 작은 머릿속에서도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지고 있을 텐데, 쓸데없이 나는 또 아이의 세상에 과도하게 관여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일부러 이솝 우화의 한 장면이나 탈무드의 한 장면을 연출해서 아이를 깨우치게 할 것이 아니라, 그냥 평소에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나았을 텐데 싶다.
이 글을 적으면서 책상을 둘러보니, 아이가 물건 욕심 많은 것이 그냥 나와 닮은 부분이구나 싶다. 으휴. 지구야 미안하다. 아저씨가 잘못했어. 아이는 한동안 ‘좋았던 거 얘기하자’ 놀이를 하자고 했다. 무지개에 대한 사랑과 김에 대한 사랑도 고백했다. 서랍 안쪽에 있던 인형들을 모조리 꺼내 침대 위에 올려두고 ‘카페’를 열기도 했다. 하루는 내가 또 참지 못하고 ‘자꾸 물건 다 꺼내와서 어지를 거야?’ 하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아휴. 그리고 또 집으로 택배 한 상자가 도착했다. 그날 할머니가 아이의 몸에 사이즈를 대 보시던 그 드레스였다. 결국은 마음이 쓰이셨던 모양이다. 아휴. 내가 또 괜한 일을 했구나 싶다. 신난 아이는 거의 무릎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이내 내 눈치를 조금 살피고는,
“오래오래 입을게, 아껴 줄게, 사랑해!”
하며 옷을 꼭 끌어안았다. 아휴. 그래, 소중한 걸 알면 됐다. 근데 너 그거 오래 못 입어. 넌 금방 커 버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