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디 드라마'를 보고 자라서

일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by 마할로

아이를 키우면서, (실은 저녁과 주말에만 잠깐씩 키우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하루가 다르다'는 말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출근하면서 잠시 보고 나간 아이의 얼굴과 집에 돌아와서 만나는 얼굴은 정말 다르다. 크느라고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이가 잠투정을 부려서 힘들게 해도 이해심이 생길 정도이다. 그러면서 나는 잠깐의 '현타'를 겪는다. 이렇게 빨리 자라는 아이의 매일 매시간 매초를 나는 얼마나 놓치고 있는 걸까? 야근 따위, 회사 따위가 뭐라고 나는 다신 오지 않을 아이와의 시간 대신 매일 긴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 걸까? 나는 좋은 핑곗거리를 하나 찾았다. 바로 어릴 때부터 즐겨 보던 '트렌디 드라마'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하루에도 수많은 드라마를 보고 자랐다. 요새는 미디어 환경이 변해서, 우리 때처럼 수십 퍼센트의 사람들이 보는 주류 드라마가 있지는 않다. 그런데 그때는 지상파에서 하는 드라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봤다. 나는 사정상 유치원을 갈 수 없었으므로 그 시간을 할머니와 함께했고, 드라마도 자연히 함께했다. 물론 그 시간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고, 지금도 그 할머니와의 시간이 그립긴 하다. 하지만 그때 드라마의 영향을 조금 덜 받았다면 어땠을까 싶을 때가 있다. 되돌아보니 당시에 봤던 드라마가 내 사고체계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드라마의 가치관이 깊이 내재화되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릴 적 즐겨 보던 드라마들은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라고 불렸다. 카메라가 빙글빙글 회전하는 키스신 장면으로 유명한 <질투>는 트렌디 드라마의 시초 격으로 여겨진다.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을 다룬 드라마들을 트렌디 드라마라고 하는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가 트렌디 드라마들의 전성시대였다. 트렌디 드라마는 점차 장르의 문법을 만들어 갔는데, 그것을 완성한 게 김희선 배우가 아닐까 싶다. 그가 SBS에서 연이어 히트시켰던 <미스터Q>, <토마토>야말로 한국산 트렌디 드라마의 완성형이자 표준이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반박이 있다면, 무조건 당신 말이 맞......지는 않을 수도 있고, 언제 한번 이야기 나누시죠?


트렌디 드라마의 서사의 중심에는 두 축이 있다. 바로 일과 사랑, 사랑과 일이다. 능력은 있지만 어려운 배경을 지닌 여성 주인공이 회사에서 빌런의 방해에도 성공해 내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사랑을 꼭 찾아야 하며, 그 사랑이 재벌 2세인 경우가 많다. 신데렐라 스토리에다 주인공의 재능 서사 몇 퍼센트를 넣고, 협찬사의 기업 홍보 역시 또 감칠맛 나는 느낌으로 버무린다. 어느 순간 기업 홍보의 함유량이 좀 많아진 드라마들이 있었고, 이런 경우에는 좀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이효리 씨가 출연했던 <세잎클로버>라는 드라마도 보일러 회사의 홍보가 좀 강했던 것 같고...... 그래서 아마 좀 잘 안 되지 않았나 싶다. 다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물론...... 이건 근데 진짜 이효리 배우에 대한 팬심이 강했던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라 객관성이 현저히 떨어지긴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박을 받지 않겠다. 에헴.


나는 어린 시절 <온에어>라는 드라마도 참 열심히 봤다. 방송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였는데, 희한하게 방송사에서는 일보다는 연애를 주로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건 뭐 안중에도 없었고, 나는 거기에 나오는 고 박용하 배우가 너무 멋져서, 드라마 PD를 하고 싶었다. 근데 잘 안 됐다. 그와 별개로 또 운이 좋아서 지금은 방송사에 들어와 있는데, 그래서 어쨌든, <온에어>에 나왔던 것들을 지금 현실과 비추어 보면, 그 드라마는 순 뻥이다. 고 박용하 배우 같은 직원은 단연코 말하는데 없다. 드라마는 거짓으로 점철돼 있다. 웃으라고 하는 농담이긴 한데, 진실이다.


그리고 중학생 땐가? 혼자 야구장에 야구를 보러 갔다가 송혜교 배우를 만난 적이 있다. 아, 그분이 나를 만나러 온 건 아니고, 드라마 <수호천사> 촬영 때문에 야구장에 왔었다. 당시 응원단장님이 '관중석에 앉아서 촬영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경기가 끝난 다음에 자리에 남아 있어 달라'고 이야기해서, 몇몇 사람들이 남았다. 텅 빈 그라운드를 보면서 제작진의 지시에 따라서 응원하는 척을 했다. 남자 주연이었던 김민종 씨가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로 야구장에 송혜교 씨를 데려와서 '야구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이었나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한참을 송혜교 배우의 뒷모습을 보며 설렜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 대사가 어땠는지 그런 것과는 또 별개로 그 드라마도 순 뻥이다. 야구장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는 없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쌓이지. 드라마는 완전히 거짓으로 점철돼 있다. 웃으라고 하는 농담이긴 한데, 이것 또한 진실이다.


아무튼! 어쨌든! 내가 열심히 보았던 어린 시절의 드라마들이 일에 대한 나의 인식을 어릴 적부터 형성해 버렸다. 직장에서의 성공이 사랑으로도, 행복으로도 이어진다는 생각 말이다. 직업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밤낮없이 열정을 다해야 하는 것이 드라마에서 보여 준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급여명세서 확인하는 장면이라든가, 초과 근무 수당을 신청하는 장면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드라마에 꼭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자꾸 직장 생활에 무게 중심을 더 옮겨 둘 때마다 이렇게 옛날의 드라마들 탓을 하게 된다.


흠. 옛날에 본 드라마들 때문에 지금 야근을 하고, 일을 많이 한다는 건, 뭐, 반은 우스갯소리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에 보는 것들은 생각보다 마음속에 많이 남아 인생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본 드라마는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도 안 나서 다시 재생해 보고, '아 이거 본 거구나'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수십 년 전에 본 드라마는 장면 장면이 HD로 보정이 되어서 남아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떤 것들을 보면서 자라게 될까? 그런 걸 하나하나 통제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집 여섯 살 아이를 보면 그것도 참 쉽지 않다. 아이가 커 갈수록 불가능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것을 보고, 혹시라도 나쁜 것에서도 좋은 것만을 받아들이면서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우리 아이들이 드라마도, 아마 야구도? 안 봐야 한다는 것인가? 아 이것 참. 잘 모르겠다. 아, 아니다. 원래 이 글의 의도는 '일을 좀 덜해야 한다', '가정에 밸런스를 더 두어야 한다'였다. 결론은 그렇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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