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이미 끝나 있었다.

9화.

by 김우연



나를 가장 힘들 게 했던 착각.

그건 바로 '사랑을 주는 법'이었다.


*


나는 오랫동안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라고 불러야만
견딜 수 있는 관계들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그 사람을 이해하려 애썼고,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지
나름의 이유를 찾아냈다.


힘들어서 그럴 거라고.
상처가 많아서 그럴 거라고.
누군가는 끝까지 남아 있어야
이 사람도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서로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힐난하고 폄하하는 부모를 보면서

나는 '이해'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내 역할이고,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랑법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모든 관계에서
조금 더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더 어른인 사람.


성숙한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내 어설픈 ‘버팀’이었다.


상대의 감정을 대신 해석하고,
상대의 분노를 대신 삼키고,
상대의 공허를 대신 채우는 일.


그 일을 잘 해내고 있다는 착각이
나를 버티게 했다.




그래서 나는
상대가 나를 힘들게 할수록
더 책임감 있게 굴었다.


처음엔 상대가 나를 믿고

의지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너만 이해해줘.”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 말들이 나를 살게 했다.


쓸모가 있다는 감각,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


그건 사랑보다 강력했다.
존재의 증명이었으니까.


관계의 무게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기울었다.


상대는 숨통이 트이고,
나는 숨쉬기가 버거워졌다.


그 사람은 점점 편안해졌고,
나는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내 말은 설명과 변명이 되었고,
그 사람의 말은 이유와 정답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걸

문제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저 내가 더 잘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관계 안에는 두 사람이 아니라

‘나’와 ‘그 사람의 결핍’만 남아 있었다.


불안, 외로움, 분노, 열등감,
자존감의 균열,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 모든 것을
나는 하나씩 받아 들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이 무너질수록
나는 더 단단해져야 했고,
그 사람이 흔들릴수록
나는 더 침착해야 했다.


그래야 관계가 유지된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순간 이미 관계는 끝나 있었다.


아주 늦게,
하나의 문장이
머릿속에서 떨어졌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라,
이 사람의 결핍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 문장을 이해하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미 몸은 알고 있었으니까.


늘 긴장한 채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상대의 불안을 먼저 감지하고,
상대의 공백을 메우느라
내 감정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


구원은 사랑의 형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살려야만 유지되는 관계는
이미 살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은 떨어지지 않게 붙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끝까지 남아 있으려는 것 뿐이었다.


구원자가 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기능이 되었고,
도구가 되었고, 역할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이상하리만큼 익숙해서
나는 그걸 문제라고 부르지 못했다.


woman-1868559_1280.jpg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고, 헌신도 아니었고,
성숙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건 내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관계의 방식이었다.


문제는 그 관계들이 끝난 이후에도
그 역할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는 거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결핍을 먼저 감지했고,
누군가의 위기를 먼저 책임지려 했고,
누군가의 경계를 대신 지키려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이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나는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싸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이미 경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며칠 뒤,
내 이름이 적힌 법원 등기를 받기 위해
우체국으로 향하면서 비로소 실감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이해하러 가는 대신
나를 보호하러 가고 있었다.


그게 내가 이젠 구원자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이전 08화나는 관계를 구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