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작을 일으키듯 잠에서 깼다. 셔츠는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주변은 온통 적막했다. 거칠어진 내 숨소리만 조금씩 울려 퍼진다. 점심밥도 포기하고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달콤한 휴식을 기대했건만. 예상치 못한 악몽은 내게 잠깐의 낮잠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낮부터 저승사자가 나오는 꿈이라니. 그 모습이 너무나 선명해서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도 또렷했다. 떠올릴수록 모골이 송연해졌다.
공포영화에서처럼 검은 두루마기와 갓을 걸치진 않았다. 꿈속의 저승사자는 길에서 마주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차림이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그에겐 아무런 혈색이 없었다. 입술부터 발톱 끝자락까지 전부 창백했다. 오색찬란한 세상에서 혼자만 흑백으로 처리된 것 같았다. 그런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니 꿈에서도 온몸이 굳었다. 핏줄 하나 보이지 않는 피리한 눈동자가 집요하게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4일. 너에게 남은 시간은 딱 4일이다.”
심장이 철렁했다. 4일 뒤면 건강검진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그 시점에 저승사자가 나와 이런 말을 꺼내다니. 현실과 꿈이 뒤섞여 두려움은 배가 됐다. 꿈속의 나는 저승사자 발밑에 납작 엎드려 울었다. 제발 나를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결국 나는 자지러지듯 악을 썼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나를 데려가려 하느냐며 화를 냈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왜 못하게 하느냐며 꽥 내질렀다. 쉬지 않고 떼를 쓰자 그제야 사자도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부실하게 먹고 다니랬느냐!”
그 말에 놀라 화들짝 잠에서 깬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전언이 아닌가. 내게 4일밖에 남지 않은 것도 억울한데 그 이유가 밥을 부실하게 먹어서라니. 개꿈이라고 무시하고 싶었지만 쉽진 않았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의 나는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때문에 생활패턴이 와르르 무너져있었다. 밀려드는 일에 치여 점심을 거른 지 벌써 몇 주째였다. 먹더라도 오후 늦게나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대충 때웠다. 속이 더부룩할 땐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부으며 하루를 버텼다. 이렇게 사느니 조상님 만나러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 것도 여러 날이었다. 건강검진 결과에 문제가 발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거울에 비춰본 나는 저승사자만큼이나 창백한 낯빛이었다. 눈 밑과 볼이 움푹 패었다. 이대로라면 진짜 저세상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그날 이후 며칠간 보양식만 찾아먹었다. 낙지에 전복에 장어까지. 스태미나에 좋다는 메뉴로 배를 잔뜩 채웠다. 4일 뒤에 다시 만난 저승사자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피둥피둥 살찌울 계획이었다. 배부르게 먹으니 잠도 잘 왔다. 어떤 꿈도 꾸지 않고 편안히 잠들었다. 꺼진 볼이 점차 차올랐다. 이제 갈 때 가더라도 때깔 좋은 귀신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운명의 날이 밝았다. 잘 먹고 잘 잤어도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의사는 내 건강검진 결과지를 한찬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뱉은 한 마디에 나는 소름이 쫙 끼쳤다.
“평소 식사를 부실하게 드시나 봐요. “
저승사자가 했던 말 그대로다.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정말로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인가 싶어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두려움을 겨우 감추고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일이 바빠서 못 챙겨 먹었는데, 요즘은 보양식으로 잘 먹고 다닌다고 말이다. 그러니 제발 살려달라는 말은 꾸역꾸역 참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의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최후의 판결을 내렸다.
“신경성 위염이시네요. 그거 말곤 건강하세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선 나는 건강검진 결과지를 다급히 살폈다. 신경성 위염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적혀있다. 불규칙한 식습관, 스트레스 등에 의해 유발될 수 있으며 현대인들에게 많이 발생한다는 식이다. 만성질환이 되지 않도록 균형 잡힌 식사와 충분한 수면이 필요하다는 흔한 조언도 뒤따라온다. 그거 말곤 정말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안도감이 온몸을 채웠다. 4일이 지나도 더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 날 만큼 다행스러웠다.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요 며칠간 내가 먹은 모든 보양식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나를 데려가지 않은 꿈속의 저승사자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바쁘단 핑계로 끼니를 거를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고,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 테니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말이다. 저승사자의 따끔한 경고 덕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개똥밭에 굴러도 배부른 이승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