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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내일도맑음 May 08. 2020

사랑을 뿌려온 산책길

사랑을 뿌려온 산책길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여기서의 환경은 시간, 장소, 사람 혹은 그 모두가 될 수 있다. 나에게는 장소가 가장 큰 영향을 준다. 나는 길눈이 어둡다. 얼마나 어두운지 특정한 목적지 없이 거닐다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나에게 눈을 감고도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의 거주지와 그 주변은 절대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길눈이 어두운 나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취미가 있다. 산책이다. 주변을 기웃기웃하며 구경하는 그 자체가 좋다.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 전과 달라진 거리, 건물들을 바라보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보물찾기 하는 것도 같고 약속 장소에서 약속 상대를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것도 같다. 고민이 있을 때도 산책을 나간다. 산책을 하다 보면 그렇게 심각했던 고민이 동네에 대한 가벼운 관심으로 바뀌게 된다. 무거웠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지난 8년 동안 수많은 산책을 했다. 정왕동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회사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바삐 가는 정신없는 길이 있었다. 마침 똑 떨어진 휴지나 생수를 사러 나가는 귀찮은 길도 있었다. 밥을 먹고 소화를 위해 사부작 나서는 여유로운 길, 반찬이 물려 새로운 맛을 찾아 떠나는 맛있는 길도 있었다. 그때마다 산책은 여유와 평화 그리고 새로움을 주었다.


  나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의 전형적인 원룸에 산다. 언제, 어떠한 산책이든 시작하면서 항상 마주하는 것이 있다. 쓰레기장이다. 쓰레기장이라기보다 쓰레기 더미에 가까운 그것은 그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 두는 곳이다. 원룸 건물에는 쓰레기 처리 시설이 아파트처럼 따로 마련되어있지 않다. 더욱이 길가에 위치하니 그 모습은 오죽할까?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이 모아둔 쓰레기 위로 행인이 던진 쓰레기들이 덮여 처참하다. 겨울은 그나마 낫다 기온이 올라 온갖 생명이 생기기 쉬운 여름이면 끔찍하다. 나의 상쾌한 산책을 위해선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한다. 약간의 쓰레기 처리 방법에 대한 고민과 큰 불쾌함으로 산책길을 시작한다. 하지만 곧 큰 불쾌함은 사라진다. 사라진 이유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바로 의류 수거함 덕분이다. 특별한 의류 수거함이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의류 수거함이다. 그런데 이 의류수거함 주변은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어있다. 혀를 내밀고 있는 것처럼 옷가지나 신발이 튀어나와 있거나 물건들이 주변에 던져져 있는 모습을 본 적 없다. 심지어 그 주변은 쓰레기들도 버려져 있지 않다. 참으로 신기하다. 쓰레기 더미나 의류 수거함 모두 목적은 같다. 나에게 필요 없어진 물건들을 처분하는 곳이다. 방법이 다를 뿐이다. 다시 쓰일 것인가 아닐 것인가. 그럼 의류 수거함의 깔끔함은 배려에서 오지 않았을까 한다. 누군지 알 수 없으나 나의 쓸모없어진 물건을 다시 사용할 누군가를 위한 배려다. 이 상반된 모습에서 나는 따뜻함마저 느낀다.


  불쾌함 따뜻함을 번갈아 느끼면서 계속 가면 학교를 만난다. 군서초등학교이다. 군서초등학교 주위를 돌다 보면 예쁜 길을 발견하게 된다. ‘노란 별길’이다. 이름도 예쁘다. 이름에서 은하수를 떠오른다. 길은 얼마나 더 예쁜지 모른다. 중간중간 나무 바닥으로 되어 따뜻하다. 또한 길을 따라 미니 화단이 가꾸어져 있다. 가로등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고 꼭대기에는 별 모양의 간판도 달려있다. 요즘 유행하는 걷기 코스가 따로 없다. 하지만 ‘노란 별 길’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길이 아니다. 이 길은 아이들과 마을 사람의 안전을 위해 조성된 길이다. 나도 간판에 달린 숫자와 길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길의 목적을 몰랐을 것이다. 목적을 알게 되고 처음엔 효과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노란 별 길’을 따라 산책을 하다 보니 이 길이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울타리가 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군서초등학교 주변은 어두운 곳이 많다. 높은 건물로 인해 일조량이 적어 어두운 것이 아니다. 낮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건물들 사이사이 공간으로 어둡다. 거기에 주차된 자동차 사이사이의 공간도 어둡다. 이러한 공간들은 낮에도 어두운 곳이고 밤이면 더 어두워지는 공간이다. 어둡고 위험하지만 아이들의 놀이터이며 마을 사람들의 터전이다. ‘노란 별 길’은 이런 공간을 밝혀준다. 작은 변화이다. 하지만 어두웠던 공간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만으로 엄청난 효과가 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빈 곳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득한 곳으로 바뀌는 것이다. 큰 종이에 연필로 ‘노란 별길’ 테두리를 긋고 그 안을 마을 사람이란 색으로 촘촘히 채워가는 느낌이다. ‘노란 별길’은 정왕동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안전하게 해주는 특별한 존재이다.


  군서초등학교를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말 반가운 가게가 있다. ‘오줌장군’이다. 이름이 참으로 이상하고 괴상망측하다. 이 집은 골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괴상한 이름과는 어울리게 80년대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문도 낡은 미닫이 문이고 문의 창에는 메뉴가 손으로 대충 쓰여 있다. 손으로 쓴 글씨는 너무도 신경 쓰지 않아 너무나 정답다. 유쾌한 간판과 입구만 보아도 가게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것 같다. 볼 때마다 반갑고 기분이 좋지만 사실 나는 이곳을 한 번도 안 들어가 봤다. 지나가면서 창문 넘어서 구경한 것이 다이다. 발을 들이지도 않고 맛을 보지도 않은 이 가게를 그렇게 반기는 이유는 이 가게의 굳건함 때문이다. 2010년에 처음 시흥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이 가게는 자리를 지켜왔다. 내가 오기 전부터 있었을 테니 훨씬 오랫동안 그 골목을 지켜왔을 터이다. 내가 2011년에 잠시 시흥을 떠나 2년 뒤 돌아왔을 때도 주변에 달라진 간판과 달리 ‘오줌장군’ 간판은 처음 그대로였다.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무척 외롭고 쓸쓸했다. 이런 나에게 ‘오줌장군’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려준 친구였다. 외롭고 쉽지 않은 타향살이에서 이 친구 같은 존재는 큰 위안이 되었다. 그 후로도 사무치게 외롭고 고독할 때 멀찍이서 바라보며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얼마 전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오줌장군’을 지나는 산책을 하던 중 간판이 바뀐 걸 알았다. 내부는 그대로였지만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깨끗하고 맨들한 간판이 걸려있었다. 서글프고 허탈하였다. 나만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뿌리째 뽑힌 듯하였다. 주인에게 가서 왜 간판을 바꾸었냐고 따지고 싶었다. ‘오줌장군’ 주인은 황당하고 어이없겠지만 정말 오랫동안 곁은 지켜준 친구의 변한 모습은 참 안타까웠다. 시간과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많은 요즘 나는 추억도 잃고 안식처도 잃었다.


  ‘오줌장군’이 있는 가게들을 지나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껏 산책을 다니면서 나는  곳곳에 애정과 사랑, 아쉬움을 뿌리고 다녔다. 나뿐만 아니라 정왕동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왕동을 다니며 씨앗을 뿌리고 다녔을 것이다. 많은 사람의 생각, 느낌과 감정이 시흥시 정왕동 곳곳에 뿌리내려 잘 자라고 있다. 고르게 뿌려져 잘 자라고 있는 사랑을 보물찾기 하듯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씨앗을 심고 키워가는 일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길 바란다.


이미지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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