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평생교육시설의 평생교육사

by 태이림

평생교육사로 전직을 결심한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은 "사람을 위한 교육"이었다.


는 아직도 교육을 잘 모르지만,

학교 교육은 인재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은

어려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평생교육은 재미있는 학문이었다.

경험과 동기가 중요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뜬구름의 끝이었지만

누군가는 이런 교육이 필요하진 않을까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육은 다르지 않을까

나에게 평생교육의 시작은 그랬다.


평생교육사 2급 자격증은 기본 이수학점과

4주 간의 실습을 거치게 되는데

프로그램 개발, 운영, 평가 등을 위주로 실습했었고

학교에서도 해당 부분을 위한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학교는 사회를 잘 알려주지 않았다.


처음 입사했던 그 회사는

학점은행제를 운영하는 원격평생교육시설이었다.


학점은행제란 학점을 통해 학위취득의 과정으로

보육교사 2급 자격증,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학위를 받는 것으로 그 당시 평생교육의

상당한 부흥을 차지했던 사업이었다.


15명 정도 근무하는 작은 회사였는데

15명 중에 4명이 임원이었고

실제로 근무하는 사람은 웹개발자 3명,

웹디자인 1명, 촬영 PD 2명, 경리 1명

학사관리팀은 나를 포함해서 4명이었다.


상사 A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상사 B는 보육교사 출신이었고

나는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소수정예 멤버팀이었다.


원격평생교육시설은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이

꼭 필요한데 나는 그 역할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어린 나는 학위를 받게 도와주는 일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입사 후 학점은행제에

대해 공부하고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 당시에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준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일주일 정도 열심히 공부했었다.


학점은행제 기관은 마치 학교와 같았다.

교수-교직원-학생이 학교라면

교수-나-고객으로 학점은행제 기관은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교직원은 분야별로 사람이 있지만

여기는 어느 중소기업처럼 나밖에 없었다.


대부분 전화업무가 많았는데 항의하거나

민원 성격의 전화가 많았다.


원격평생교육 시설인데 개발의 문제인지

개인의 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항의 전화가 많았다.


수업 성적에 관한 이의신청들도 있었다.

학부생의 나는 교수님에게 사죄와 굽신의 메일을

날렸던 것 같은데 누군가는 기관에 전화해서

돈을 받았으면 제대로 성적을 줘야지

이렇게 하면 어떡하냐고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라웠었다.


나는 혼자서 상담도 하고 정신없이 바쁜데 교수들은

나를 "조교"라고 부르면서

오만가지의 일을 요구했다.


촬영 전에 교재 검수나 본인 강의의 PPT 등을

요청했었다. 혹은 입금되지 않은 강의료에 대해서

큰 소리를 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전화"라는 양날의 검에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였다.

전화는 보이지 않은 소통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감정노동이 심했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감정의 쓰레기통 같은 대화에

젊은 날에 나는 같이 맞대응할 용기가 없어서

전화를 끊고 나서 울어버리기 일쑤였다.


이때부터 무례한 것에 대한 분노가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과 근무했지만 감정기복이 컸던 나는

울고 웃으며 하루를 버티듯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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