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기다림

천천히 더 천천히

by 포동이

취준생 시절, 막힌 변기를 뚫다 글을 쓴 적이 있다. 검색과 사색을 총동원해 다양한 요법을 써보았으나, 쉬이 뚫리지 않던 변기. 가만히 기다리다 저절로 뚫린, 지저분한 일화를 바탕으로 '기다림'의 중요성을 짚은 글이었다.


지난 추석 연휴엔 1박 2일로 내 고향 대구에 다녀왔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즉흥적으로 내려갔다. 전부 다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잠시나마 아버지의 일상을 살아보았다는 점.


핫플레이스나 교외의 멋진 풍경을 찾진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살고 계신 곳, 자주 찾으시는 식당, 종종 산책하시는 공원에 갔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성격이 좀 급한 분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번엔 천천히 드시고, 천천히 걸으시고, 천천히 들으셨다. 내게도 모두 천천히 하라고 하셨다. 느린 호흡이 장수의 비결이란 말씀도 덧붙이시며, 천천히 쉬라고 하셨다.


첫날 일정을 마치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 밤. 아버지가 욕조 자랑을 하셨다. 이 집에서 제일 좋은 게 욕조라며, 목욕을 권하셨다. 했다. 약간 뜨겁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까르띠에 시계나 반지 따윈 없지만,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알고 있다. 프레임을 중요시했던 작가로 기억하는데, 그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결정적 순간'이 아닐까 싶다.


지난번 보도사진에 이어 거듭 사진을 언급하는 이유는, '기다림'을 생각하기 위해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언어로 미루어볼 때, '결정적 순간', '결정적 사진'을 만나기 위한 조건. '기다림'이다.


오늘 아침 나는, '기다림의 힘'을 생각한다. 기다리는 거다. 장소나 자세를 수시로 바꾸는 게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기다려보는 거다. 짧게도 기다려보고, 길게도 기다려보는 거다. 어떤 결정적 시점과, 지점에 이를 때까지.


유난히 사진을 잘 찍으시던, 프레임이 무엇인지 사진으로 말하시던, 그래서 '앙리 카르티에 주레송'이라는 별명을 들으시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더불어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사진들을 떠올려본다.


다시. 아버지는 성격이 급한 분일까? 글쎄... 생각의 속도가 빠른 분이라 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또 기다림이 필요한 순간엔, 충분히 기다릴 줄 아는 분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다시. 가족을 생각하는 요즘이다. 기다리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앙리 카르티에 주레송처럼. 결정적 순간이, 내게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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