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같은 남자 육아 휴직
이렇게 순둥인데, 너네는 진짜 거저 키우는 거야
고맙게도 백일 무렵부터는 배고프거나 졸릴 때 말고는 울거나 보채는 일이 없어졌다. 양가 부모님 모두 아이가 너무 순하다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동생 조차 조카와 비교해 아프지도 않고 때도 안 쓴다며 정말 쉽게 키우는 거라고 했다. 근데 진짜 힘든 거 맞는데. 남들보다 더 힘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나는 정말 힘들어.
특히 힘든 시간은 새벽이다. 저녁에 씻기고 우유 먹어서 재우는 데 깊게 잠들면 다행이지만 얕은 잠만 자고 계속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 보통 새벽 3-4시까지 잠을 잘 수 없다. 아기를 안고 서서 자장가를 부르며 돌아다니기도 하고, 안고 짐볼을 두 시간씩 타기도 한다.
그렇게 겨우 동틀 무렵에서야 온전히 재우는 데 성공한 날이었다. 아기를 침대에 누이고 혼자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남편이 침실에서 나왔다.
왜 불도 안 켜고 앉아 있어?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나네.
왜?
열 달이나 힘들어서 죽을 고비 넘겨서 아기 낳았는데 바로 육아에 던져진 느낌이야.
오늘도 낮잠 못 잤어?
낮잠이 문제가 아니야. 이렇게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도 어제는 우유 먹이다가 기절할 거 같더라.
아기 무럭무럭 자라고 점점 이뻐져서 너무 대견한데, 나는 점점 내가 아니어지는 거 같아.
내가 애 보고 네가 회사 다니면 제일 좋았을 텐데.
네가 이렇게 집에만 있을 애가 아닌데라고 말하며 남편이 내 헝클어진 머리를 넘겨주었다. 남편 회사는 육아 휴직을 쓰는 남자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여자들도 출산 3개월 후에는 대부분 복직하는 분위기다. 남편은 내 출산일 포함 이틀 쉬고 바로 출근했다. 만약 남편 회사가 남자 육아 휴직도 가능한 곳이었다면 내가 6개월 남편이 6개월 번갈아 쓰거나 나는 출산 휴가 후에 바로 복귀하고 남편이 육아 휴직으로 1년 쉬는 등의 옵션이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회사의 경우 남자 육아 휴직 케이스를 종종 보곤 한다. 아직도 많은 남자 직원들은 육아 휴직을 쓰지는 않는다. 휴직이 가능하다고 해도 생활비의 압박이나 커리어 개발 상의 문제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부 모두에게 육아 휴직이 가능하면, 그만큼 선택의 옵션이 넓어지니까 육아가 훨씬 수월해진다.
계속 맞벌이를 할 생각이니 때문에 육아 휴직 1년은 아이와 오롯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어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신생아도 돌봐주는 육아 도우미 프로그램이 있기는 하지만 좋은 분을 만날지 아닐지는 복불복인 상황에 아이를 맡기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유아 학대 사건을 보면 이 세상 맞벌이 부모들은 얼마나 다들 가슴을 쓸어내리고 고민하게 될지 내 상황을 포함해서 안타깝다.
일하고 성취하고 인정받는 사이클이 회사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이제는 그런 사이클만으로는 커리어의 미래를 생각하기 어렵다는 걸 안다. 부모의 육아 휴직, 믿을 수 있는 보육 시설, 플렉시블 한 근무 시간 같은 것들이 보여주기 식 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가 일하고 성취하고 인정받는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걸 안다.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친구 두 명이 있다. 공교롭게도 한 명은 미국, 나머지 한 명은 네덜란드에 살고 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는 기본적인 것들은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별 차이가 없어서 서로 육아 꿀팁을 나눌 수 있어서 도움이 된다. 두 친구 모두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휴직을 해서 나보다 복귀 시점이 이르다.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도 친구 남편도 재택근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친구가 일주일에 2~3일, 남편이 2~3일 재택근무를 번갈아서 하면서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일하고 사이드로 가사 도우미나 육아 도우미 서비스를 필요할 때 사용한다고 한다. 꼭 육아휴직이 아니라도 재택근무나 유연한 근무시간도 육아에 있어서 고려할 수 있는 옵션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부모님 세대에는 여자는 임신하면 회사 그만두고, 남자는 당일에만 병원에 가거나 그것도 퇴근하고 가는 분위기였다고 아버님이 지난번 식사 때 말씀해 주셨다. 지금 우리 세대는 직장마다 차이는 있지만 출산 휴가 3개월을 보장받고 정부에서 아동수당도 지원해 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회사 생활과 육아를 양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딸이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때에는 이런 어려움들이 해결되어 있을까.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을 주기 위해서는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