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제일 친한 친구랑 오랜만에 만났다. 보리밥 정식으로 저녁을 먹었던가? 후식으로 단팥죽을 먹으러 갔다. 가을에 접어들 무렵이라 밤공기가 조금씩 싸늘해지던 때였다. 친구는 몇 년 전 다녀온 아이슬란드가 요새 그렇게 생각이 난다고 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만 길고 긴 비행시간을 견딜 자신도, 일주일 넘게 일정을 비울 여유가 없다고. 그렇지. 휴가라고 해봐야 3박 4일 정도면 다니까 말이야. 그리고 휴가는 다녀온 날부터 또 가고 싶잖아. 같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건강 이야기로 옮아 갔다.
나 요즘 이 닦을 때 아빠 소리 나더라.
아빠 소리. 그 소리 있잖아. 이 닦으면서 토하는 것처럼 으웩 으웩 하는 구역질 소리. 친구가 웃음이 터졌다. 이쁘게 윽 하는 소리 말고 진짜 몸 저 안쪽에서 뭔가 올려 내는 것 같은 소리. 도대체 왜 아빠는 저런 소리를 내는 거야라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내가 딱 그 소리를 내면서 이를 닦더라고.
버스도 안 오고 날은 춥고 집에 도착하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씻을 힘도 없어서 소파에 쓰러졌다. 9시도 안돼서 집에 왔는데도 왜 이렇게 피곤할까? 남편이 말한다. 다 나이 들어서 그런 거지 뭐. 알고는 있는데 슬프네. 겨우 소파에서 벗어나서 씻고 나왔더니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은 엄마가 한참 동안 잘 챙겨 먹고 다니라고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물었다.
너 임신인 거 아니니?
에이. 설마. 그냥 피곤한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 한번 테스트해봐. 엄마의 직감이란 예나 지금이나 너무 정확해서 놀랍다. 내 임신을 처음 안 사람은 엄마다. 나이 먹어서 그렇다고 자조했는데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보고 나서 남편이랑 둘 다 놀랐다. 이거 진짜일까?
그다음 날 병원에 가니 11주라고 했다. 아주 조그마한 점을 보여줬는데 그 안에서 더 작은 심장이 뛰고 있다고 했다. 이 소리가 내 아기의 숨 쉬는 소리구나. 내 안에 아기가 있어. 초음파를 볼 때는 눈물이 살짝 났다. 너무너무 작은 나의 소중한 아기. 이 날부터 주기적으로 산부인과를 방문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대기 환자 : 35세, 김*희 님.
아침 대신으로 두유를 빨며 대기실에 앉아서 화면에 이름이 뜨면 진료실에 들어가는데, 이 화면에 이름과 함께 표시되는 게 나이였다. 도대체 왜? 동명이인 때문이라면 전화번호 뒷자리나 환자 번호 일부를 보여주면 될 텐데 왜 나이를 띄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나이 표시가 이런 의문만 준 건 아니었다. 지루한 대기 시간 동안 화면에 나오는 숫자를 보며 저 사람은 나보다 어리네, 많네 가늠했다. 그런데 나보다 어린 산모가 얼마 없었다. 병원에는 반차를 내고 평일 아침 일찍 가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토요일에 갔는데 그 시간대 환자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해 보이는 직장인이었다. 왜 나이를 표시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끝까지 알 수 없었지만 비슷한 나이 때가 모여있는지는 마지막에 알게 되었다. 20주 차가 넘어갈 때쯤에 진료 장소가 바뀐다고 했다. 다음 진료부터는 앞 건물은 본관의 산부인과로 가라고 했다. 지금 진료를 보는 곳은 위험군에 속하는 산모나 난임 클리닉 다니는 사람들이 대상이란다.
제가 위험군이에요?
산모 나이 35세 이상은 고령 임신으로 위험군이어서요.
그럼 그동안은 위험군으로 관리받은 건가요?
기본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위험도가 조금 더 높으니까 조금 더 관리하는 거라고 보시면 돼요.
조금 더 뭐를 관리해줬는지 모르는 채로 다음 진료 날이 되었다. 본관 산부인과에서는 전보다 20대와 30대 초반 산모들 비율이 좀 더 높았다. 여전히 진료실 앞 모니터에는 진료 대기 순서와 환자 정보가 보였다. 긴 대기 시간 동안 새로운 습관도 생겼다. 나도 모르게 30대 후반 이상 산모가 보이면 눈에 안 띄게 쳐다보면서 관심을 가졌다. 몇 주나 되었을까? 하나도 안 부었네? 저 임부복 편해 보이는데?
언제 임신하고 언제 낳겠어.
전혀 안 늦었어. 병원에 40대도 엄청 많아.
내가 휴직한다고 하면 회사에서 난리 날걸?
결혼한 지 5년이 좀 넘은 동갑 친구가 있다. 얼마 전 팀장으로 승진해서 더 바빠져서 자주 못 보다가 모처럼 만나게 됐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친구가 난임 클리닉을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경험들이 힘들어서 다시 가는데 망설여진다고 했다. 그때도 나이 때문에 성공 확률이 반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더 낮을 텐데 그 과정을 다시 겪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게다가 지금은 업무 때문에 전처럼 시간 내기도 어렵고 회사에서도 곤란해 할거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고생해 온 것들을 다 포기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친구의 어려움이 이해됐다. 승진한 친구를 응원해야 할지 안쓰러워해야 질지 모르겠는 상황에 마음이 답답했다.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면 임신한 나 때문에 자연스럽게 임신과 출산이 주제로 등장한다. 우리는 모두 10년 넘게 회사 생활을 했다. 이제야 커리어가 안정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어떤 친구는 결혼을 생각하고 결혼한 친구들은 임신을 생각하고, 결혼 생각이 없는 친구들 중에는 박사나 이민을 고민하기도 한다. 인생의 한 단계 한 단계 성실히 살아내면서 내 힘으로 인생을 만들어 가고 있다. 때문에 결혼 연령은 갈수록 높아지고 임신 연령도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이런 현실 속에서 '35세 이상 임신은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이 문구로 결혼을 서두르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너네는 이미 늦었어라고 알려주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출산율을 숫자로 해석하고 해결 방안을 논의하면 여성의 사회 참여로 인한 출산율 둔화가 문제라는 단골손님이 등장한다. 그래서 여성을 사회 참여시키지 말아야 하나? 똑같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사회에 나왔는데 나의 사회 참여가 출산율 저하의 요인이라는 건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도, 성과를 내면서 회사의 중추가 되는 30대도, 조직을 이끄는 40대도 누구나 임신이 축복일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 임신과 사회생활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병행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많은 선후배들이 있어야 한다.
언제 아이를 갖는 게 중요한지 알려줄 시간과 에너지를, 언제든 아이를 가지면 걱정 없이 낳고 기를 수 있는데 쓰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내 위치에서 주변 친구들에게 후배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 육아 꿀팁을 공유하고 휴직과 복귀를 같이 고민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 용기를 주고 싶다. 오늘도 고군분투하며 아이를 기르고 복귀할 날을 생각하면 긴장되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고 회사일을 하는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용기나 선례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