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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 My Today Nov 15. 2019

시간 관리는 주부에게

오늘도 참 수고가 많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핸드폰을 확인한다. 캘린더와 ToDo 앱을 켜서 오늘 해야 하는 일을 확인하고 Baby Time 앱을 켜서 아기의 대략적인 수유, 배변 스케줄을 예상해본다. 이렇게 매일 아침 5분 정도 시간을 내서 오늘을 계획한 후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한다.


예정일을 2주 앞두고 시작된 육아 휴직(*정확히 말하자면 출산 휴가. 출산 휴가 3개월이 끝나면 육아 휴직이 시작된다) 초창기에는 지금과 하루를 사용하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나는 원래 잠이 많지 않은 스타일이다. 임신 때도 낮잠은 거의 자지 않았고 밤잠도 그전에 비해 크게 늘지 않았다. 그래서 휴직 시작 후 갑자기 주어진 자유시간이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남편과 같은 시간에 기상하고 아침을 해 먹고, 남편이 출근하고 난 조용한 집에서 음악도 듣고 넷플릭스도 보고 빨래도 하루에 한 번씩 돌리고 침대와 소파 정리까지 다해도 오전 9시. 도서관에서 웬만한 육아 서적은 모두 빌려 본 상태고 맘카페 게시판도 정주행 해서 지금 당장 출산이나 육아에 궁금한 것도 많지 않았다.


회사 생활을 나의 시간과 노동을 월급으로 교환하는 행위로 생각한다면, 회사에 나가지 않는 지금은 내 시간과 에너지를 무엇으로 바꾸고 있을까? 


임신인 걸 알고 나서 휴직 기간 동안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바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많은 항목 중에 넷플릭스, 왓차, 유튜브 프리미엄 정기 결제하고 정주행 하는 것만 완료했다. 수요일 오전 10시, 팀 사람들은 주간 회의하고 있겠지? 금요일 오전마다 있는 보고는 잘 지나갔으려나? 휴직과 함께 회사 앱들을 모두 삭제하고 회사 생각 절대 안 할 거라고 자신했는데, 겨우 갖게 된 내 자유 시간 동안 그렇게 싫어하던 보고 시간이나 상상하고 앉아있네. 휴식이 달콤하지 않고 자기반성으로 채워질 때쯤 아기가 나왔고 조리원에 들어갔다.


마음껏 즐겨, 지금이 마지막일 거야.


출산 축하 메시지에 아이를 기르는 친구들이 하나 같이 한말이다. 조리원에서 최대한 쉬고 회복하고 즐기라고. 일 년을 계획한 휴직이 겨우 시작했는데 2주 간의 조리원 생활과 함께 휴식이 끝이라니. 양쪽 가슴이 뜨거운 바위처럼 변하는 젖몸살 와중에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변해야 한다. 누가 시키지 않고 누가 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변해야 한다. 다시 오지 않을 1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지.


캘린더 앱에 출산일을 기준으로 계산한 신생아 주차별 발달 사항을 입력했다. 예방 접종 시기, 이유식 전환, 백일, 태아 보험 설계사 컨택 등등. 그리고 분기 단위로 개인 목표를 세웠다. 산후 둘째 달까지는 외출이 어려우니 집에서 할 수 있는 재테크랑 영어 공부. 유튜브로 구독해 놓은 영어 회화 채널 하루에 2개씩 보고 경제 관련 뉴스 확인하고 격주에 한 권씩 관련 책 읽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맞닥드린 현실은 친구들 말만큼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정신없었다. 너무 작고 연약한 아기를 한 번도 아기를 키워본 적인 없는 사람이 길러도 되는 건지 계속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도 신입은 연수도 받고 사수를 통해 먼저 업무에 익숙해진 후 작은 업무부터 시작하는데, 회사일보다 천배는 중요한 생명을 기르는 일은 이렇게 다짜고짜 시작해도 되는 건가? 삼각함수나 오래 매달리기 같은 거 배울 시간에 육아의 기초 정도는 학교에서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는 데 어떻게도 달래지지 않는 갓난아이와 씨름하면서도 기를 쓰고 세워둔 목표는 달성했다. 물론 영어 동영상 2개를 본다는 건 암기하거나 연습한다는 의미가 아니니까 말 그대로 플레이만 하고 넋 놓고 보거나 기저귀 갈면서 어깨너머로 소리만 들은 적이 태반이지만.  


첫 달을 보낸 후 목표를 많이 수정했다. 우선 가짓수를 확 늘렸다. 달성하기 어려운 한 개 대신에 달성하기 쉬운 세 개로 늘렸다. 내용도 영어 공부처럼 지금 당장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들로 바꾸었다. 

목표를 세우는 것도 성과를 내는 것도 평가를 하는 것도 모두 나 스스로의 일이니 나를 움직이게 하고 만족스럽게 하는데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안 보이는 일을 보이게 하자.


성과를 만드는 건 큰 목표가 아니라 디테일에도 완성도를 높이고자 하는 과정이다. 올해 매출 목표 얼마!라고 외치는 건 쉽지만 공허하다. 뭉뚱그린 커다란 목표를 오늘 내가 해야 할 타깃으로 쪼개서 매일매일의 To Do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아래는 수정을 거듭한 현재 버전의 내 목표와 그에 따른 할 일이다. 목표는 중요도가 높은 순이고, To Do는 생각나는 순서다.


<목표: 후회 없는 1년 보내기>

쓰는 인간 To Do: 아이디어는 무조건 메모하기, 주말에 두 시간 이상 쓰기, 블로그 시작

건강한 몸 ToDo: 하루 두 끼 이상 챙겨 먹기, 비타민과 칼슘 챙겨 먹기, 매일 스트레칭이랑 플랭크 10분, 최소한 격일 주기로 광합성 

머리에 기름칠 To Do: 주 단위로 영어 뉴스 챙겨 보기, 마케팅 관련 뉴스 스크랩

연결된 삶 To Do : 주 단위로 양가 부모님께 아기 콘텐츠 업데이트, 친구들과 작은 프로젝트 하기


<목표: 건강하고 행복하게 크는 아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 To Do : 아기의 생활 리듬 매일 기록, 정확한 분유 개량과 깨끗한 소독, 발달 단계 관련 육아 서적 체크 하기, 매일 저녁 정해진 시간에 목욕

잘 웃고 잘 놀기 To Do : 하루 두 번씩 노래 불러주며 마사지, 동화책이나 초점책 1권씩 읽기, 무릎에 앉히고 서로 눈 맞추고 대화 1번 이상


<목표: 홈 스위트 홈 만들기>

오전 To Do: 침대 정리. 아침에 일어나서 냄비에 생수 넣고 다시마 넣어서 다시물 우리기. 냉장고 확인하고 오늘 식단 짜기. 부족한 식재료는 바로 이마트 앱 들어가서 장바구니에 담아 놓기.

오후 To Do: 흰 빨리 세탁기 돌리고 끝나면 건조기에 넣고 이어서 아기 옷 돌리기. 세탁물 맡기기. 젖병 소독. 빨래 개서 제자리에 넣기. 가습기 청소.

월간 To Do : 의료비 영수증 모아서 실비 청구, 월세 및 관리비 납부, 화분에 물 주기, 화장실/베란다 청소


아이를 재운 후 조용한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오늘 완료함 todo 리스트를 쭉 확인한다. 오늘도 정말 열심히 살았다. 주간회의 공유나 팀장 보고 없이도 나는 스스로를 위해 노력하고 이렇게나 성과를 내고 있다. 삼십 년 넘게 살면서 이렇게나 밖으로 티 안 나게 열심히 산적이 없다. 


너무 사소 한 거 아니야? 목표랑 목적을 혼동하고 있는 거 같은데? 결정적으로, 그래서 누가 알아주냐고? 불쑥불쑥 나를 하찮게 하는 의문이 치밀어 오를 땐 말이야, 생각하는 거야.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멈추면 어디에도 못 가잖아. 이렇게 구르고 구르다 보면 어디라도 갈 거야. 그리고 그게 어딘지 나는 알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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