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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 My Today Nov 14. 2019

우리의 냉전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나 아파.


남편이 감기에 걸렸다. 기침도 하고 콧물도 나는 모양이다. 발포 비타민을 챙겨 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럼 애 못 보잖아.' 독박 육아 예감에 아픈 사람 걱정보다 몸 관리 제대로 안 했다는 생각에 울컥 짜증이 났다. 아픈 사람한테 짜증 내봐야 뭐하겠나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빨리 나아야 육아 동료로 복귀할 테니 우선 회복시키는 게 관건이라는 생각이 이어서 들었다. 냉동고에서 생강을 꺼내서 배랑 같이 끓여서 먹이고 저녁은 청양 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콩나물 국으로 준비했다. 


조용한 냉전.   


하루하루 지날수록 남편 기침이 더 심해진다. 출근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병원도 다녀온 것 같은데 나아진 기미가 없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바로 소파에 늘어지는 모습에 울컥 짜증이 올라온다. 평소에는 하루 종일 아기와 씨름하면서 남편 귀가만 기다린다.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샤워도 하고 남편 회사 이야기도 듣는 소중한 저녁 시간이 달라졌다. 남편이 감기에 걸리니 저녁이면 돌볼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 아기에게 옮길 수 있으니 자의 반 타의 반 남편은 집에 오면 강제 육아 OFF.  피곤에 절어서 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면 내 남편이니 짠한 마음이 들어서 얼른 씻고 들어가서 자라고 등 떠밀다가도 아기가 응가해서 혼자 씻기고 치우고 잠투정이 안 달래 져서 한 시간 내내 짐 볼을 탈 때면 참을 수 없는 화가 났다. 큰소리를 내며 싸우진 않았지만 내 말투는 점점 차가워지고, 남편도 서운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마음이 지옥이야. 


몸이 피곤하면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다. 힘드니까 날카로워지고 예전에는 넘어갔을 문제들이 싸움의 씨앗이 되고, 마음에 담아둔 지난 일 까지 엮어져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진다. 매일매일 같은 얼굴을 보고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작은 불만이 쌓이고 자꾸 눈에 띄는 상대방의 흠과 합쳐져서 하루를 삼켜버린다.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열이 올라서 어두운 생각이 마음속에서 날개를 편다. 어떤 갈등이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논리적인 접근이나 정확한 증거 같은 것들은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대방을 더욱더 방어적으로 만들어서 골이 깊어진다. 오히려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해결의 실마리가 된다.라고 머리로는 잘 알겠는데 행동이 어려웠다. 


회사에서는 크고 작은 트러블이 있어도 계속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목표와 성과라는 잣대를 통해 종국에는 해결이든 결론이 났다. 만약 끝까지 문제가 되는 상황이나 사람이 있다면 조직 이동이나 이직이라는 카드도 있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은 전혀 달랐다.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다양한 역할을 퇴근과 이직이 없는 24시간 평생 지속되는 환경 하에서 매일 반복되는 타스크를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예측 안 되는 이슈들을 해결해 나가야 했다. 정확한 성과 측정과 보상이 없는 것은 덤이다. 천국도 지옥도 될 수 있는 게 결혼인 것이다. 


내 열등감이야. 이해해줘.  


겨우 받은 전화로 들리는 남편 목소리. 갑자기 쑥 들어온 솔직함에 하루 종일 벼리고 벼린 날카로운 말들과 시나리오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얼마나 고민하고 내려놓았는지 느껴졌다. 시시비비를 따져서 이기고 지는 건 의미 없다는 뜻인 걸 알겠다. 싸울 땐 안 나던 눈물이 난다. 


노력하고 있다는 건 잘 알지만, 내가 더 애쓰는 거 같은 느낌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 안 하는 일 없는 거 알아. 그런데 그 일을 내가 말 안 해도 스스로 알아서 했으면 좋겠어. 회사일은 누가 쫓아다니면서 시키지 않아도 하잖아. 


더 노력할게. 대신 내 속도에 맞춰 할 수 있게 배려해 주면 좋겠어. 그리고 한마디 말이라도 칭찬 좀 해줘. 아무리 열심히 설거지하고 청소해도 아무 말 없잖아. 너 말처럼 만약 회사일이라면, 내가 이렇게 하면 상사들이 엄청 칭찬할 걸? 


결혼 전부터 혹시라도 남편이 가사분담은 당연한 일인데 혹시라도 도와주는 걸로 생각하진 않는지 예민했다. 회사 나가서 돈 버느라 애쓰고 집에 와서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피곤과 체념의 아이콘이 될까 봐 늘 경계했다. 우리는 동갑이라서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개인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는 물론이고 직장 생활 고민도 가장 먼저 의논하는 상대다. 군대를 다녀온 남편이 나보다 직장 경력이 짧은 만큼 때 커리어에 대해서는 때로는 내가 더 많은 조언을 하기도 한다. 결혼 전까지 동등한 위치에서 평등하게 지내온 친구들도 결혼과 함께 집안일이나 양가 관련 문제에 있어서는 많이 달라지는 걸 봐았다. 그래서 우리도 결혼과 함께 달라질까 봐 무서웠다. 남편이 변할까 봐 두려웠다기 보단 오히려 내가 문제의식 없이 별 수 없지 않냐고 하면서 순응하고 체념해 버릴까 봐 경계했던 것 같다. 남편은 남편대로 변한 거 없이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전보다 민감해진 내가 힘들었나 보다. 주변 누구보다 집안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아프거나 피곤할 때도 예외를 주지 않아서 서운했다고 한다. 차라리 회사는 아프면 당당하게 병가 내고 쉴 수 있지만 집에서는 쉬고 있어도 눈치 보였다고. 


너 진짜 잘하고 있어. 고마워. 


결국 돈도 시간도 아닌 한 마디 말이 서로에게 그렇게 아쉬웠나 보다. 회사에서는 감사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그렇게나 많이 하는데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는 그러지 못했다. 


광고주한테 하는 거 반만 해도 업고 다닐걸? 


예전에 회사 동료가 배우자를 광고주라고 생각하고 대하면 싸울 일이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라고 했다가 하지 말라고 했다가, 좋다고 했다가 싫다고 하고 종잡을 수 없는 광고주 비위는 그렇게 맞추면서 정작 가족은 어떻게 대하고 있는 건지 새삼 생각했다. 물론 그 후 가족을 광고주처럼 대하는 대신, 가족보다 소중하게 광고주 대하는 일을 관두게 됐다. 


나 이제 화 풀렸어. 그런 의미에서 노래 하나 불러 봐.


우울하거나 아플 때면 종종 남편한테 노래 하나 불러달라고 한다. 평소에는 절대 안 불러주지만 오늘 같은 날엔 안 부르기 쉽지 않을 테니, 침대에 누워서 감상할 자세를 잡았다.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이래서 미워도 미워할 수 없어 사는 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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