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특기는 한 말 또 하고 또 하기
어 알아. 어제 말했어.
횡단보도를 걷다가 멈췄다.
너도 그렇거든? 너도 한 번 한 말 여러 번 반복하거든?
나는 근데 말 안 하고 그러려니 지나가거든?
우리 같이 나이 먹어가느라 그런가 보다고 대답하는 남편의 손을 마지못해 잡고 마저 길을 건넜다. 1년 만에 함께 본 영화는 다행히 정말 재미있었고 마지막 부분에는 남편도 나도 조금 울었다.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 품에서 아기는 잠들어 있었다. 아가도 엄마 아빠만큼 즐거운 하루를 보냈나 보다. 할머니랑 신나게 놀고 우유도 많이 먹고 응가도 한 모양이었다. 아기를 침대에 누이고 엄마랑 식탁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엄마, 나 요즘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그런다?
넌 아직 정말 괜찮아. 엄마는 맨날 네 동생이 뭐라고 하잖아. 한말 백번 반복한다고.
백번은 아니야. 걔는 왜 또 그랬데.
엄마도 외할머니 보면서 네 나이 때 생각했거든. 왜 저렇게 한 말 또 하나 답답하다고.
그랬어? 외할머니도 그러셨구나.
잠이 안 와서 사두고 안 읽은 마케팅 책들을 뒤적였다. 평소에는 마케팅은 실전이지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뭐라도 읽고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잦아들 것 같았다. 몇 달이면 달라지는 시스템,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트렌드 같은 건 책으로 쫒아갈 수가 없다. 그래도 복귀해서 미팅하거나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 모르는 용어에 당황하는 일 정도는 피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을까? 원래 알던 내용도 책으로 보니 새로워서 괜히 더 심란해서 책을 펼쳤다 덮었다 했다.
안 자고 뭐해?
공부하고 싶은데 읽어도 머리에 안 들어오네. 진짜 늙었나 봐.
잠에서 깬 남편이 물 마시러 나왔다가 옆에 앉았다. 뭐든지 빨리 이해하고 바로 실전에 적용하는 게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나이는 더 먹었는데 나아지는 거 없이 퇴화만 해서 돌아가게 생겼다. 내가 한 말도 기억 못 하고 반복하는 데 회사에 돌아가서 어떨지 불안하다. 남편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놨다.
네 고민은 아마 우리 나이 또래는 다 하고 있을 거야. 나도 하는 고민이고. 근데 우리에겐 예전에 없는 게 있어.
주름?
책임감. 아는 선배가 말해 준 건데, 처음엔 되게 싫었거든?
근데 자식이 생기니까 좀 이해가 되더라.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고
진짜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하게 돼.
전에는 다음 달이나 내년일을 주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우리 딸이 학교 들어갈 팔 년 후,
대학 갈 이십 년 후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뭘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더라고.
그렇게 길게 보니까 지금 힘든 건 그래도 잘 참아지는 거 같아.
엇. 우리 남편이 언제 이렇게 컸지. 회사 스트레스로 나날이 커지는 다크서클 덕분에 사람인지 판다인지 구분도 안됐는 데 지금 보니 의젓한 아빠다. 다들 이렇게 부모가 되고 또 강해지는 건가 보다. 그래. 분명 더 좋아진 것도 있어. 기억력은 잃어도 인내심을 얻었다. 생각만 해도 힘이 나는 존재가 생겼다. 그리고. 또 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일 이면 기억이 나겠지. 우선 잠을 자고 힘을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