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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Jan 04. 2019

끌림 없는 관계 맺음의 공허함

'도구적 인간관계의 삭막함에 시달리는 우리'


출근하면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1400여 명의 번호가 등록돼 있었습니다. 사회에 나와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을 품으며 꾸준히 모아 온 소장품. 그런데 최근 한 달간 통화한 사람은 10여 명 남짓 될까요? 아무리 많은 연락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번호는 숫자일 뿐, 전화번호 개수가 진정한 인간관계를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친밀한 관계는 강요로, 이해타산적인 마음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으니까요. 인간끼리의 자석 같은 끌림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딸아이가 7살 때, 아래층에 이사 온 동갑내기와 두어 번 만났어요. 성향이 매우 달랐는데, 그 아이는 딸내미를 좋아했습니다. 얼마 후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우연히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학하자마자 딸내미에게 단짝 친구가 생겼어요. 서로 강한 끌림이 작용했던 거겠죠. 아래 집 아이와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층 엄마는 자꾸 아이를 딸에게 붙여 주려고 애썼습니다. 심지어는 담임을 찾아가 딸이 친구를 빼앗겨 힘들어한다고 상담했고, 여럿이 불편해지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교우 관계를 억지로 맺지 않습니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 끌어당기는 친구를 저절로 만나게 되니까요. 자연스러운 관계라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성인이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끌림 없는 관계는 자연스럽지도 않고 오래가기도 어려워요. 


  그런데 무대를 사회로, 직장으로 옮기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자석의 N과 N, S와 S극처럼 원칙적으로 서로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과도 꾸역꾸역 관계를 만들고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니까요. 1400여 명의 전화번호를 소장하고는 있지만, 관계는 대부분 과거의 어느 한순 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SNS에서 수백 수천 명씩 친구를 맺지만, 정작 속마음을 터놓을 진짜 친구들은 사라지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한 직장에서 지낸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강한 끌림으로 가까워진 동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끔 술 한잔하고 싶을 때 떠오르는 사람도 물론 소수입니다. 한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일시적으로 모인 이해타산적인 관계에서 쉽게 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편히 기댈 수 없는 차가운 인간관계의 한계겠죠. 이 때문에 인간관계는 끌림보다는 도구적 관계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선배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도 이제 차 부장급하고 자주 어울려야지. 이제 곧 팀장 될 사람들인데, 여기저기 얼굴도장도 좀 찍어 놓고…"


  도구적 인간관계를 구축해 생존 가능성을 높이라는 조언이었을까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에 순간 제가 직장 부적응자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싫은 사람과 어울리며 억지웃음도 흘려야 하고, 참석하기 싫은 자리에 꾸역꾸역 나가 명함을 주고받을 때도 있습니다.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고,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명연기를 펼칠수록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꽤 낡은 직장인이라 어떠한 역할도 무난한 연기로 적당히 소화하며 버티고 있으니까요. 종종 가식적인 웃음으로 입가에 경련 일으키는 저를 술잔에 담그면서 말이죠.


  하지만 도구적 관계를 위해 스스로 계산적인 자리를 만들거나, 끌리지도 않는 자리에 이해타산을 따지면서 얼굴을 내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회생활 하는 동안 제가 지키고 싶은 마지노선이라고나 할까요.


  세상이 각박해지면서 인간관계는 점점 도구적 관계로 변질하고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 맺는 인간관계 덕분에 1400여 개의 전화번호를 소장하고도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어도 어느 날 뜬금없이 떠올라 전화할 수 있는 사람, 울적할 때 마음 편하게 만나자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끌림이라는 설렘이 서로를 여전히 팽팽하게 이어주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것보다 머릿속에 저장된 소중한 얼굴을 떠올리는 연습이 더 절실한 이유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맺음은 아름다운 것이고,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학창 시절 여자친구가 제 절친을 좋아하는 걸 알고, 그들에게 갖은 심술을 부릴 때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당연히 둘 간의 끌림이 있었던 거겠죠. 진정한 인간관계의 시작은 이런 끌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끌림은 설렘을, 설렘은 애틋한 감정의 싹을 움트게 하니까요. 


  도구적 인간관계의 삭막함에 시달리다 보니, 가끔은 자석에 이끌리듯 누군가에게 쉽게 빠졌던 그때 그 시절이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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