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잘도 돌아온다. 그만큼 세월이 빠르다는 거겠지. 감사하게도 곧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의미겠지. 도돌이표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내 모습에 한숨짓는 일이 다반사다. 명절에는 이와 더불어 떠오르는 아련한 기억이 있다. 명절 아침을 지독하게 싫어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복합적인 감정이되살아 나는 그날.
부모님은 형제가 별로 없다. 고모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아빠의 유일한 핏줄인 작은 아빠는 미국에 살았다. 엄마도 남매다. 외삼촌은 사업 차 외국에 머물렀다.그래서 명절날 네 식구만 있는 우리 집은 늘 잔잔했다.
그런데 꼭 한 가지 치러야 할 과제가 있었다. 가족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반강제적인 등산이다. 주동자는 아빠. 어느 순간부터 당연한 명절행사로 자리 잡았다.
"산에 가서 맑은 공기 마시면서 호연지기를 만끽하자."
아빠의 그럴듯한 명분이었다. 차례만 끝나면 온 가족이 산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산을 누볐다. 누나랑 나는 너무 가기 싫었다. 아침마다 대성통곡 하며 끌려가기도 했다. 입을 최대한 내밀고 따라나서기 일쑤였다.
하지만 누나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참석 여부 자율권을 획득했다. 엄마도 가기 싫으면 불참. 아빠는 나만 끌고 산으로 향했다. 영광스럽게도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중고등학생 때도 산에 가기 싫어 서러운 눈물을 흘려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당근(용돈, 장난감, 옷 등)으로 나를 이끌었다.
고3이 됐는데도 계속됐다.
"하루 공부 안 해도 대학 가는 데 아무 지장 없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누나는요?' 나는 그렇게 계속해서 끌려다녔다. 고등학생 때는 머리가 좀 컸다고 인상을 박박 쓰면서 따라나섰다. 일종의 반항이었다. 그다지 통하진 않았다.
세월은 잘도 흘러 나는 대학생이 됐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이듬해 설 연휴에 운 좋게 특박을 나왔다. 부모님께 미리 얘기 안 하고 아침에 '짠'하고 나타났다. 차례를 끝내고 아빠랑 누나랑 산에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오랜만의 가족 상봉이라 기분 좋게 따라나섰다. 세 식구가 함께한 소중한 시간.이때가 셋이 함께한 마지막이었다.
산에서 내려올 때 아빠가 그랬다.
"나는 이제 늙어서 몇 년 지나면 산에 가고 싶어도 못 가. 아빠 건강할 때 잘 따라다녀라."
사진을 보니 아들보다 훨씬 크던 젊은 아빠는 세월에 치여 너무 작아져 버렸다.
흘리듯 들었던 말은 결국 몇 년 뒤 현실이 됐다. 아빠가 늙어서가 아니다. 갑자기 함께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명절 아침, 어릴 적에는 산에 가기 싫어 울었는데, 다 커서는 돌아가신 아빠가 떠올라 울컥한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기분 좋게 따라나서지 못했을까. 후회스럽고, 죄송스럽다.
효도라는 게 참 얄궂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깨닫지 못한다. 아빠가 이렇게 쉽게 가족을 떠날 줄 몰랐다.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엄마에게 나머지 효도를 못 하며 살았다. 최근 엄마가 원인 모를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엄마랑 여행 같이 간 게 언제지? 엄마 나으면 같이 여행 가자."
누나가 말했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뤘다. 엄마와의 여행,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가 아프니까급해졌다. 자식들이 이렇다.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엄마는 몸이 아프고 나이가 들었다. 속상하고 미안하다.
뒤늦게 알았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자식들은 금세 자라고, 부모님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진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