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드id Jan 20. 2021

미안해, 처음이라 그랬어

'아이들과 함께 자라며 다시 아빠가 되어 가는 중'


순간 코끝이 시큰했다.
아들이 기특해서가 아니라
너무 미안해서였다.


결혼한 게 엊그제 같다. 마음도 여전히 이팔청춘이다. 인정머리 없는 세월이란 놈. 첫째가 벌써 중학생이 된다니. 시간에는 발이 아니라 로켓이 달린 듯하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만큼 열심히 늙는 중이다. 고맙게도 여전히 귀여움 넘치는 아이들을 보면서 더더더 귀여웠던 꼬물이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온갖 재롱으로 과분한 효도를 선사하던 그 시절. 사진과 영상으로 추억을 재생하다 보면 세월의 무상함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부모가 처음인지라 늘 수월하고 즐겁지만은 않았다. 당연히 우여곡절도 많았다. 첫째가 태어나고는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다. 이렇게 쉽게 아빠가 되는구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살 터울 둘째가 생겼다. 첫째도 즐겁게 키우는 중인데, 둘째가 별거냐 싶었다. 큰 오산이었고, 오만이었고, 착각이었다.


둘째는 손을 많이 탔다. 엄마 품에서 벗어나면 울고 시야에서 사라지면 자지러졌다. 듣는 고통이었다. 힘들었다. 덕분에 아내는 아이와 잠시도 떨어지지 못했다. 아내가 둘째와 씨름하는 동안 첫째 육아를 맡고 살림을 틈틈이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은 지옥이었다. 잠깐도 못 참는 아들 울음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점점 예민해졌다.


첫째와 달리 까탈스러운 아들은 용쓰 아빠를 당차게 거부했다. 점점 달래기도 싫었다. 몸도 마음도 점점 멀어졌다. 아니 내쪽에서 조금씩 밀어냈다. 아내 표정에 그늘이 졌다. 집안 분위기는 엉망이 됐다. 둘째가 태어난 후 다툼도 잦아지고 냉기 흐르는 시간도 늘었다. 모든 게 둘째 때문이라는 삐딱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내와 합의했다. 주말에 둘째를 보지 않 첫째 육아와 살림을 맡겠다고. 아내도 그동안의 과정을 지켜봤기에 침통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바쁜 주말이 시작됐지만 아들 울음소리 잦아들었다. 몸과 다르게 마음은 편했다. 그렇게 6개월 된 아들에게서 조금씩 달아났고, 아빠라는 이름을 달고도 아들을 살갑게 품에 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내와 첫째가 참여하는 행사가 잡혔다. 혼자 둘째를 봐야 하는 상황에 겁부터 났다. 엄마에게 SOS를 보냈지만, 외할머니가 편찮으셔 여의치 않았다. 아내에게 행사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여차하면 떠넘기거나,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둘째가 울고 불고 행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집에서의 최악보다는 엄마가 있는 곳에서의 최악을 택했다.


행사장 근처에 머물면서 아들을 돌봤다. 두려웠지만 울음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기 띠도 매고, 유모차에도 태우고, 차에서 음악도 들려줬다. 둘째 태어난 이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들은 온종일 떼를 쓰지도 울지도 않았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빠의 걱정을 녹여버렸다. '어디서 애가 바뀐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순간 코끝이 시큰했다. 아들이 기특해서가 아니라 너무 미안해서였다. '이놈이 삐딱한 아빠 마음을 알아챘나?'


남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도 결정된다.


그동안 아들 보는 게 힘들고 짜증 나 마음에 철옹성을 쌓았다. 조금만 칭얼대도 아내한테 넘기면서 아들을 밀어냈다. 둘째 업바짓가랑이 잡고 칭얼대는 첫째에게 시달리며 식사 준비하는 아내 뒷모습도 떠올랐다. 아빠에게 외면받은 줄도 모른 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생글거리는 아들을 보며 반성하며 울컥했다.


둘째가 태어난 지 반년이 다 돼서야 정신이 들었다. 태어나 지금껏 품에 안은 시간보다 이날 하루 품에 안긴 시간이 더 많았다. 성큼성큼 흘러가는 세월을 겪으며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내리사랑이란 것도 저절로 깨우다. 아이들은 어릴 때 평생 할 효도를 다 한다는 내 엄마의 말은 매일 되새겨도 질리지 않는다.


"남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도 결정된다. 남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였다면 그만큼 자신에게도 행복이 온다. 자녀가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행복을 느낀다. 자기 자식이 좋아하는 모습은 어머니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이치는 부모나 자식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조차 내리사랑이 있었나 보다. 플라톤의 말처럼 행복은 스스로가 만들며,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쁘다는 이유로, 힘들다는 핑계로 아들에게 행복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미안했다.



철부지 아빠에게 구박받던 아들은 세월을 훌쩍 넘어 초등학교 5학년이 된다. 영화도 같이 보고, 운동도 함께 하고, 오목과 장기, 보드 게임, 모바일 게임도 울려 즐긴다. 우여곡절이 세월을 뛰어넘은 후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아이돌과 게임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꼭 끌어안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짓궂은 장난에 화내고 짜증 내고, 우는 모습마저 지독히 사랑스럽다. 특히 콸콸 넘치는 애교가 가장 마음에 든다.


알고 있다. 품 안의 자식이라는 걸. 금세 훌쩍 커 품에서는 벗어나겠지만 어릴 때 받은 평생 효도는 앞으로 내가 살아갈 큰 위안이 되리라 믿는다. 누구나 아빠가 처음이다. 그래서 서투르다. 초보 아빠는 초보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며 다시 아빠가 되어 가는 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는 대성통곡하는 나를 끌고 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