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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Mar 30. 2021

세상 모든 이름에 담긴 부모의 희망

"헛된 욕심이 아닌 살아갈 희망을 품었을 뿐이다"


나는 네가 잉태됐을 때부터
널 부를 이름을 찾기에 무척 애를 써왔다.


자식은 부모 뜻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부모는 자식이 공부와 운동을 잘할 뿐만 아니라 성격과 인성도 좋아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조금 더 나아가 인기도 많 바란다.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어쩌면 자식에 대한 욕심과 기대는 부모에게 주어지는 원초적인 당연함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 바람과도 같은 바람인 듯하다.


48년 전 누나에게 쓴 아빠 일기에는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에 대한 짙은 기대와 바람이 담겨 있었다. 처음 자식을 품 37살 늦깎이 아빠는 파릇파릇한 희망을 일기장에 구절절 새겨 넣었다. 그 기대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네가 잉태됐을 때부터 널 부를 이름을 찾기에 무척 애를 써왔다. 아들이건 딸이건 내게서 태어나는 생명은 이제까지 나나 네 어머니가 살아온 그런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의 존재로 만들어 주어야 된다는 생각에 소위 가계, 족보상의 돌림자를 무시했으며 또 음, 양이니 오행이니 하는 성명 철학이 개입할 여지도 없애기 위 한문도 피다.


그러나 바람마저 없을 수는 없었다. 아들이면 건강하고 잘못된 세상쯤 바로잡을 수 있는 지혜와 덕과 용기 있는 인간이 되길 바라 그런 뜻의 이름을 지어주어야 되겠다 했고, 딸이면 따스한 봄볕과도 같은 덕성을 지녀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여자가 되길 바라 그런 뜻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머리로는 한글 두 자로 꼭 맞는 그런 뜻의 말은 찾을 수는 없었다. 기껏 찾은 게 <슬기>였다.


네가 훗날 네 이름에 불만을 갖게 될지 몰라도 <슬기>라는 이름은 내가 정성껏 어렵게 찾은 이름이라 생각 자랑스럽게 여겨 주기 바란다. 그리고 '슬기'란 모든 세상사를 밝게 깨닫고 바르게 해결하는 지혜와 능력이 아니냐. 그런 지혜와 능력이면 세상의 봄볕으로 비유해서 별 억지스럽지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슬기>로 부른 것이니 이런 네 이름의 뜻에도 명심해 주기 바란다. 


<1974. 12. 16. 아빠의 일기 中>




누나는 ' 따스한 봄볕과도 같은 덕성을 지녀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여자가 되길 바라는 의미'에서 <슬기>라는 이름을 얻었고, 나는 '잘못된 세상쯤 바로잡을 수 있는 지혜와 덕을 갖춘 용기 있는 인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둘 다 한글 이름이다. 大田을 우리말로 한밭이라고 하듯 내 이름의 '한'도 크다는 뜻이며 '이'는 사람을 지칭한다. 더불어 성이 장 씨이다 보니, 장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까지 더불어 얻었다. 장하다의 뜻은 기상이나 인품이 훌륭하다는 뜻이다. 


아빠는 일기장에 헛된 욕심이 아닌
앞으로 살아갈 희망을 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남매는 아빠가 지어준 이름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지 않는다. 나는 별 용기도 없거니와 모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아등바등 살고 있다. 누나는 따듯함과는 거리가 먼 시크한 성격으로 인생을 헤쳐나가고 있다. 조금씩 기대와 다르게 자라는 자식을 보면서 아빠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아마 아빠도 금세 깨달았을 것이다. 부모의 바람은 기대일 뿐이고 자식은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격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름은 이름일 뿐이라는 현실을.


자라면서 아빠에게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은 이름에 얽매인 구태의연함이 아니었다. 정직하게 살라는 일침 하나였다. 부하라는 잔소리 한번 듣지 않고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자유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는 아빠의 조언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척했다. 천은 별개이자 선택의 문제였다. 아빠의 기대는 시나브로 하향 평준화되었고 막연한 바람은 현실에 파묻혔다. 현실에서 가장 실천 가능성 높은 바람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정직함 하나.


아빠도 현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잔소리나 닦달이 자식에게는 부담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아빠의 수십 년 전 바람은 사랑에 피어난 새싹이었지만 결론은 포기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아빠의 바람 속에서 자라 아빠의 마음과 닮은 마음을 품는다. 아이들이 태어나 부모가 되었을 때 감개무량함을 느꼈지만, 아이의 삶은 억지로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수시로 깨닫고 받아들이고 있다.


아빠는 가족을 떠나기 전 한 번이라도 수십 년 전 써놓은 당신 일기를 들춰보았을까. 그렇다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름대로 자라지 못한 자식에 대한 실망은 하지 않았을 거라 믿고 싶다. 무탈하게 장성한 자식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안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아직 아이들이 한참 자라는 중이지만 내 마음도 그렇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빠는 일기장에 헛된 욕심이 아닌 앞으로 살아갈 희망을 품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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