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숫제 고독을 천성처럼 타고나서 남보다 신비스럽게 돋보이기도 하고 그렇지는 못할망정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닌다거나 또는 가끔 알사탕을 꺼내 핥듯이 기호품의 일종처럼 음미하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편리한 재간이 없었다."
박완서 장편소설 <나목>에 등장하는 화자의 넋두리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거 같아 기억 속에 저장해 둔 구절.
'고독하다'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하다'는 말이고, '외롭다'라는 말은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는 뜻이다. 둘 다 '쓸쓸하다'는 의미로 결론 난다. 그런데 '고독'에는 왠지 모를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홀로 떨어져 있지만 혼자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할 것 같은. 반면 '외로움'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들어맞는 듯한 느낌이랄까.
젊었을 때는 고독이든, 외로움이든 혼자라는 기분이 지독하게 싫었다. 불안 증후군이랄까. 무조건 전화번호를 뒤적였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백지장처럼 리셋된 기억을 되짚으며 소중한 시간 한 뭉텅이를 버리고 온 기분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습관적으로 고독과 외로움을 밀어내길 반복했다. 무조건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혼자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말 그대로 고독을, 외로움을 조절할 편리한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자꾸 의미 없이 사람들 주변을 겉돌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대단한 능력자 같았다.
싸이월드 파도타기를 통해 만나자는 일면식도 없는 동창을 만났고, 혼자 사는 친구 집에 무작정 눌러앉아 시간을 탕진했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 몰래 아빠 차를 끌고 나와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줄였다. 금쪽같은 시간을 도로에 뿌렸고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도서 <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에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는 말이 등장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뇌의 휴식을 의미하는 용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대 의대의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클 교수는 사고, 기억, 판단 등 인지 활동을 할 때만 두뇌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런 인지 활동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특정 부위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실험 결과 뇌의 특정 부위는 실험 대상자들이 문제 풀이에 몰두할 때는 활동이 오히려 감소하는 반면 아무런 인지 활동을 하지 않고 멍하게 있을 때는 평소보다 활성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자아 성찰, 자전적 기억, 사회성과 감정의 처리 과정, 창의성을 지원하는 두뇌 회로로 인지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연구실이 아닌 욕조에서,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 누워 멍한 상태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전설적 경영자로 불리는 잭 웰치는 제너럴 일렉트릭 회장 시절 매일 1시간씩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1년에 2주씩 외딴 오두막에 처박혀 지내는 사유 주간을 갖곤 했다.
뇌가 온전히 쉴 기회를 수시로 박탈하며 살아왔다. 혼자 있는 시간은 자기 계발의 시간이자 자아성찰의 시간이었다. 뇌를 쉬게 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일을 준비하는 값진 순간. 소중한 시간을 몰아내며 탕진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허탈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는 시간도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걸 왠지 모를 조급함에 망각했던 시간이다.
"가장 끔찍한 빈곤은 외로움과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마더 테레사의 말처럼 부족한 사랑에 대한 몸부림이었을까? 자신을 먼저 충분히 사랑했다면 외로움이라는 불안이 비집고 들어오지 않았을까.외로움을 망각할 수 있는 고독의 기술 습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