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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Nov 22. 2019

직장인에게 내려진 가혹한 형벌

'소소한 집착이 내 삶에 나비효과를 일으킬 지도...'


어렴풋하게 들리는 통화 소리에 기분이 상다. 옆 팀 선배가 건강 검진을 미루는 것도 아니라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바쁘다는 이유. 건강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모습도 불쾌했지만, 메스꺼운 말은 막바지에 터졌다.


"회사에는 불이익 없는 거죠?"


'아... 누가 누굴 걱정해'라는 말을 던져 선배를 맞출 뻔했다. 아마 규정상 검진을 포기할 수는 없을 거다. 선배 건강을 걱정하는 건 아니다. 듣기 싫은 말이라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어쩌면 '잘 들었지. 나 이렇게 회사에 충성하고 있어'라는 걸 널리 퍼뜨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살기도, 저렇게 되기도 싫다는 처절한 기오랜 시간 곁에 머물렀다.


몇 년 전 함께 일하던 팀장이 암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삶을 등지기 전까지 회사를 걱정했다. 생일날에만 그의 흔적이 페이스북에서 되살아 날 뿐, 많은 이들이 그를 잊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다짐하곤 한다.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그러지'라는 의미. 저렇게 아등바등 죽을 때까지 회사에 충성하는 걸 말한다. 과유불급이라는 걸 사회생활하면서 참 많이 실감했다. 팀장은 가정보다 회사, 부모보다 임원을 더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임원이 지나가기 전 달려가 회전문을 돌려놓던 사람. 술 마시기 싫어 속 주머니에 한약을 품고 다니는 임원 대신 술을 받아 마시던 사람. 어느 누구도 그 이상할 수 없을 만큼 상사에게 충성하고 회사를 사랑했다. 그리고 건강을 잃고 회사를 떠났다. 육신을 버리고 세상을 떠났다. 철 모르는 초등학교 3학년 딸이 장례식장에서 뛰어다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대통령이 추천한 책 <90년생이 온다>에 '세대별 충성의 대상 차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충성의 대상 :

70년대생 '회사 그 자체'

80년대생 '자기 팀과 프로젝트'

90년대생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


충성의 대가 :

70년대생 '회사에 대한 충성은 곧 나에 대한 충성' 80년대생 '몸값과 승진을 보장함'

90년대생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됨'

 

70년대생과 90년대생의 생각을 과연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기성세대만 충성하고 밀레니얼 세대는 충성을 버릴까? 90년생이 팀장 위치에 서면 모든 게 달라질까? 작금의 직장인 마음은 90년대생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다. 현실을 명확하게 파악해도 별수 없으니까.


직장생활은 전쟁이고, 실전이고, 모방이고, 답습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나도 모르게 실에 홀딱 젖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태어난 년도 숫자가 커진다고, 나이가 어리다고 新 직장인이 古 직장인과 확연히 다른 삶을 살지 않는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직장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도 형벌을 피할 수 없다.


변하기 싫지만, 일하기 싫지만, 출근하기 싫지만, 웃기 싫지만, 그만두고 지만, 화내고 싶지만, 두들겨 패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형벌. 건강해지고 싶지만 건강하지 못한 형벌이 가장 큰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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