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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Jan 09. 2020

되도 않는 글 쓴다고 친구 팔아먹냐고 했다

"작가 병 걸려서 더 그런 듯 그냥 살던 대로 살아"


글을 쓰면서 사람들 이야기에 더욱더 귀 기울이게 됐다. 들은 소리를 깊숙하게 들여다다. 머리가 좀 바빠졌다고 할까. 이런 분주함은 언제라도 환영이다. 나에게 생각하는 시간은 마음을 가다듬고 한층 더 성숙해지는 과정니까.


덕분에 엉뚱한 상상, 멍청한 상상을 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자력갱생自力更生(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어려움을 타파하여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일)의 일환이라고나 할까. 과녁이나 목표물이 있어야 겨냥을 할 수 있듯 언제부턴가 글쓰기는 '자력갱생'이라는 목표를 향다.


대부분의 글이 경험에서 튀어나오니 특정인이 등장하는 가 많다. 좋은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적을 때는 망설이게 된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아졌다. 내가 쓴 글을 세상 모든 사람이 볼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랄까. '혹시 당사자가 보는 거 아니야?' 하는 과대망상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내가 글을 쓰든 책을 쓰든 주변에서는 크게 관심 없다. 열혈 독자였던 누나도, 아내도, 친구도 이제  브런치 글에 흥미 없다. 그래서 아내나 누나, 친구 이야기도 검열에서 자유로워졌다. "다른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너한테 관심 없어"라는 진리를 늦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일면식 없는 사람의 댓글이나 조언이 훨씬 반갑고 소중하다.


몇몇 단톡방 친구에게 브런치 글을 공유하곤 했다. 아무도 관심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아주 가끔 생각날 때만 보낸다.


어느 날 브런치의 '브'자도 모르던 단톡방 친구가 갑자기 링크를 하나 보냈다.


"야! 이거 내 얘기 아니야? 열 받네. 되도 않는 글 쓴다고 친구 팔아먹냐? 어이없네."


맞다. 친구 얘기였다. 딱 걸렸다. 그것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제일 친한 친구다.


"더 심한 도 많지만 내가  걸렀지."


내가 보내글을 보다가 파도타기 하듯 자기가 등장한 글을 찾아낸 거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잘 아는 친구는 내가 점잖게 글 쓰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 강산이 세 번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흘렀어도 내가 변했다는 걸 용납조차 안 다. 무슨 말만 하면 "작가병 걸려서 그래"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다. 


중년으로 접어드는 길목, 서러움에 몹시 우울하다는 얘기를 나누던 중 친구는 답했다.


"작가 병 걸려서 더 그런 듯. 그냥 살던 대로 살아."


친구 덕분에 우울증이 내 정신세계로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거침없는 베프다.


아내는 글 쓰는 덕에 내가 차분해졌다고 한다. 착해졌다는 말도 종종 한다. 글을 쓰면서 나는 감정 조절을 자력갱생하는 중이다. 하지만 가끔 얼굴 보는 친구는 나를 여전히 어린 시절 부지로만 여긴다. 나쁘지 않다. 친구를 통해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웃고 떠들 수 있으니 좋다. 그리고 친구의 진심을 안다. 얼마 전 만난 내 아내에게 슬쩍 "쟤가 저렇게 책 많이 읽고, 글 잘 쓰는 줄 몰랐네"라는 말을 했다니 말이다.


주변 모든 사람이 내 글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늘 감사하고 그들 이야기에 더욱더 집중한다. 좋은 말은 주변을 부지런히 둘러보며 열심히 사는 보상이라 여기고, 나쁜 말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 이래 저래 무언가를 적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활력이고 희망이다.


그래서 작가 병 걸렸다는 친구 말도 거북하지 않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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