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살,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방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아빠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문을 잠갔다. 출근하는 아빠가 문 손잡이를 돌렸다. 딸깍딸깍. 열린 창문으로 여름 공기가 잔뜩 몰려들었음에도 담배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자는 척했다. 아빠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보낸 기척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떠나기 며칠 전 아빠가 최신형 칼라폰으로 바꿨다. 철없는 아들은 기어코 아빠 휴대폰을 빼앗았다. 낡은 흑백 폰을 아빠에게 넘겼다. 아빠가 남긴 이 너덜너덜한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마음이 아렸다.
아빠를 마주할 마지막 기회를 담배 때문에 박탈하고, 아빠의 전화기를 빼앗았다. 아빠에게 해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러 댔다. 끝 모르는 후회는 십 수년을 타고 흐르며 여전히 곁에 머물러 있다.
소중한 사람이 쉽게 떠날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엄마가 아프고 또 아프다. 엄마는 나이를 먹으면 여기저기가 고장 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식은 마음이 구슬프다. 아빠가 허망하게 떠난 사실이 사무치게 억울했다. 그러면서도 엄마 또한 허망하게 떠날 수 있다는생각은 하지 못했다. 엄마가 아프니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는 걸 알았다. 외면할 수 없는 기시감에 서글프기 그지없다. 비겁한 변명 한 줌으로 죄책감을 덜어내고 있을 뿐이다.
"엄마 아프니까 이렇게 온 가족이 자주 모이잖아. 안 그랬으면 우린 무심하게 엄마를 보냈을지도 몰라."
으르렁거리기 바빴던 누나가 외국으로 떠나고 난 후에야 그리움을 배웠다. 오랜 세월 떨어져 지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느꼈다. 시도 때도 없이 누나를 놀리고 드잡이 하던 시절이 소중했음을 알아갔다. 가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멀어지는 게 아니라 더 애틋해지는 관계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아내와 싸우고 화가 정수리를 뚫고 솟구치면 갈라설 생각까지 한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이 나를 다독인다. 과연 아내 없는 삶이 가능할까? 현실을 곱씹으면 이내 아내가 한없이 고맙고 소중해진다. 부록처럼 아이들까지 더없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 사방에 도사리는 경험의 힘이다.
'딸깍딸깍' 방문 손잡이 돌리는 소리가 오랜 시간 마음에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나이를 먹으면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경험은 사람을 조금씩 인간답게 만든다. 후회와 변명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후회와 변명을 하나씩 내려놓고 마음속 불안을 다스리는 지혜를 선사한다. 옳지 못한 행동, 옳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 같아도 실수 역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일 뿐이다.
'뭔가 불안해'에 담긴 의미
알쏭달쏭한 온갖 불안에 사로잡힌 요즘이다. 사람들은 곧잘 '이유 없이 뭔가 불안해'라는 말을 자주 털어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유 없이, 의미 없이 불안해하지 않는다. 내면의 내밀한 근거가 불러일으키는 불안감을 최소화하고 싶은 욕구일 뿐이다. 가족 걱정, 잊고 싶은 실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밀한 죄책감 등. 자신만 아는 작은 근거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때문에 '불안해'라는 말에 '이유 없이 뭔가'라는 수식어를 얹어 조심스러운 말을 건네며 스스로를 달래는 게 아닐까.
소중한 사람이 곁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일, 더없이 슬프고 또 슬픈 일이다. 내가 내뱉는 '뭔가 불안해'라는 말에는 엄마의 건강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는다.아프고 약해지고 언젠가는 떠날 거라는 나만의 슬픔을 불안 속에 녹여 버리고 싶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유 없이 뭔가 불안해'가 소중한 사람과 연관되었다면 그 사람이 떠난 후 심경을 한 번쯤은 헤아려야 한다. 너무 소중해 소중한 줄 몰랐던 누군가가 더없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내게 소중한 모두가 편히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정류장이 되어주고 싶은 요즘이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명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