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수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당당한 딸
"오늘도 아빠가 딸에게 배웁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담임) 선생님 추천으로 학교 글쓰기 대회에 반대표로 참여한 적 있다. 상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시험기간과 겹쳐 시간에 맞춰 책을 읽지 못했다. 마감일이 다가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아빠가 대신 독후감을 써줬다.
마감일을 지킨 제출에 의의를 뒀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최우수상을 탔다. 대운동장에서 펼쳐진 전 학년 조회시간에 단상에 올라 상까지 받았다. 최우수상을 받은 후 학교 대표로 도대회까지 나갔다. 결과는 깜깜무소식.
...
딸에게 물었다.
"OO이 같았으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엄청 찝찝했을 거 같은데요?"
대필 작가도 아니고, 돌이켜 보면 아빠도 나도 민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이나 친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마음을 간직한 채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 이제 내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었다.
중3 딸아이가 최근에 중간고사를 봤다. 한 과목의 주관식 6점짜리를 하나 틀렸다고 했다. 풀이 과정은 맞았는데, 답 순서를 잘못 썼다고.
지나가다 마주친 선생님이 "OO이 주관식 다 맞았더라?"라고 해서 딸아이는 "아니요. 틀린 거 있어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시험 후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한 명씩 불러 주관식 문제를 체크했다. 풀이과정도 맞고 답도 보이니 선생님은 틀린 문제를 맞았다고 착각했다.
머뭇거리다가 자리로 돌아온 딸아이는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을 찾아가 자신이 틀린 문제에 대해 말했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다시 차근차근 보더니 "어? 그러네?"라며 이미 나온 성적을 정정했다.
어린이날 캠핑장에서 고기를 먹으며 딸아이는 시험 이야기를 쿨하게 들려줬다.
"부분 점수받아서 몇 점 안 깎였어요."
"오! 멋지다. 잘했어! 근데 아빠 같으면 앗싸!라고 했을지도 몰라."
"친구들도 그랬어요. 왜 말하냐고. 이해 안 된다고."
아쉬운 생각을 잠깐 했지만, '참 잘했네'라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사실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내 아빠가 써준 독후감으로 상을 받고 누가 알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내가 떠올라 부끄러웠다.
한 문제라도 더 맞혀 전교 등수 하나라도 더 올랐으면 하는 바람으로 생각한 점수보다 낮게 나왔을 때는 답안지를 확인하러 간 적도 여러 번 있다. 공부를 월등하게 잘하지도 못했으면서 점수에 연연하던 시절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다면 세상을 좀 더 느긋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16살 밖에 안 된 중학생 딸이 아빠보다 어른스럽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딸내미가 시험 점수 몇 점에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를 실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나에게 말했더니 "틀린 건 틀린 거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역시 쿨한 내 누나답다. 딸아이도 장녀라서 그런지 누나와 비슷하게 든든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자라고 있다. 아빠처럼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앞으로도 당당하게 정직하게 삶에 맞서는 당찬 딸로 무럭무럭 자라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