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OTT] 드라마 <레이스> 현실과 너무 닮아 뜨겁고 불편했습니다
경쟁과 사내 정치가 판치는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직장인의 삶을 다룬 디즈니+ 드라마 <레이스>를 완주했다(12부작). 크게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대기업 홍보팀을 주축으로 펼쳐지는 스토리라는 사실을 알고 급 관심이 생겼다. 대기업 홍보팀에서 15년 일한 경험이 있기에 제삼자 입장에서 나의 직장생활을 엿보고 싶었다.
십수 년간 내가 겪은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은 최초의 드라마였다. 많은 순간 고개를 끄덕였지만 수시로 드러나는 씁쓸하고 날카로운 팩트와 과거의 기억에 불편하기도 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 박윤조(이연희) 대리의 상황이 현실 속 나와 많이 겹치는 점도 흥미로웠다.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우여곡절 많았던 과거가 살아났다.
비공채 출신 대기업 직장인이라는 점, 에이전시(을)에서 하루아침에 클라이언트(갑)가 되었다는 점. 이로 인해 펼쳐지는 시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까지 비슷했다.
"공채 아닌 것들이 이상한 짓을 한다니까. 씨, 쯧."
드라마의 배경인 대기업 '세용'의 홍보팀장 발언이다. 드라마에는 공채의 우월감을 보여주는 멘트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반대로 공채 출신들을 혐오하는 비공채 출신 직장인도 등장한다.
대기업은 대부분 공채 문화가 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기에 그들 간의 의리와 결속력은 끈끈하다. 입사 초부터 십수 년간, 퇴직 후에도 모임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문화 속에서 비공채 출신, 그것도 신입으로 15년간의 경쟁을 버텼다. 심지어 나는 대기업 아르바이트생으로 시작했다. 대학원에 다닐 때 출산 휴가를 떠난 직원을 대신해 3개월 동안 홍보팀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다.
다행히 팀장 눈에 들어 3개월 아르바이트 연장, 1년의 계약직을 거친 후 공채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입사했다. 대놓고 차별하는 문화는 아니었지만, 학벌도 딸리는 편이었고, 공채를 챙기는 문화나 동기 모임 등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직에서는 공채, 비공채의 관계 문화뿐만 아니라 은근한 차별도 존재한다. 지나고 보니 나쁜 차별이라기보다는 공채 입사의 치열함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자 대우라는 생각이 든다.
비공채에 대한 차별 문제를 제기한 익명 게시판 글에 누군가 "누가 공채로 들어오지 말래?"라고 남긴 댓글에 씁쓸함을 느낀 적도 있지만, 스스로가 감당하고 헤쳐 나갈 문제였다. 비공채 직원은 대부분 경력직이기에 공채 직원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을 만큼의 업무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바로 비공채의 경쟁력이다.
드라마 주인공 박윤조 대리도 '스펙아웃'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그간의 경력을 인정받아 대기업 홍보팀에 입사한다.
"저 경력 8년입니다. 팀장님."
"밖에서 뭘 했는지도 모르는 경력 8년, 세용 신입보다 못할 수도 있는 그 8년. 나한테는 박 대리, 신입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요. 알겠어요? 자기 위치?"
업무를 맡겨 달라는 주인공 박윤조 대리에게 팀장이 쏘아붙인 말이다. 대행사 경력 8년을 깡그리 무시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동안 쌓아둔 경력과 실력을 차근차근 발휘해 팀장에게 인정 받는다.
나 역시 대기업 입사 시 에이전시에서 일한 경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자잘한 경력과 경험을 살려 직장생활에 활용했다. 스스로 주변 동료에 비해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더욱 노력했다. 모든 업무에 성실하게 임하고자 애썼다. 덕분에 진급도 밀리지 않고 나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조직 생활에서는 출신성분이 아닌 자신의 업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공채 출신 중 마지막이 안 좋은 선배도 많았고, 비공채 중에서도 잘 나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괜한 열등감으로 가슴앓이하며 보냈던 사회초년생 시절의 시간이 아쉬울 다름이다. 공채든 아니든 결국은 모두가 퇴사라는 출구를 향해 걷고 있는 직장인일 뿐이거늘.
"박 대리 뭐가 죄송합니까? 그거 죄송한 거 아니니까 죄송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그렇게 저자세로 나가면 나중에 일 시키기 곤란해집니다. 지금은 에이전시 아니니까 지금 박 대리 위치 어딘지 잘 생각해서 행동하고 말해야 한다고."
대행사 출신이라 '을' 역할에 익숙한 박윤조 대리에게 직속 팀장이 한 말이다.
대학 졸업 후 일 년 반 정도 광고대행사에서 일했다. 금요일 퇴근 시간 즈음에 클라이언트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만든 시안에 대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며 그냥 퇴근했다. 얼마 뒤 회사 실장님께 전화가 왔다.
"야! 넌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분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나이가 한참 많은 실장조차 그 어린 클라이언트를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서러웠다. 출근 시간이 오전 9시인데 7시 반에 전화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난 적도 있다. 고작 다음 미팅 일정을 잡자는 이유에서였다.
운 좋게 대기업에 입사해 박윤조 대리처럼 순식간에 갑의 입장이 되었다. 을의 입장이 어떤 위치인지 알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친근하게 협력사를 대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나를 바라보는 선배 입장은 달랐다.
"좀 갈궈. 네가 갈구지 않으니까, 말을 안 듣잖아."
평생 갑 노릇만 하던 선배였다. 누구나 평생 갑으로 살지는 않는다. 입장이 바뀌었을 때 내가 당하면 불쾌할 일은 상대에게도 하면 안 된다.
"내가 살아오는 55년 동안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의 갑질로 상처 주었던 나 자신과 상처받았던 모든 님들께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최근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갑질을 아주 심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갑질 당하는 을 처지가 되어 보니 많이 아팠고,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또렷하게 자각하기 시작하니 부끄럽고 고통스러워 견디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한 블로그에 올라온 <나의 갑질로 상처받았던 님들께 용서를 빕니다>라는 글의 일부다. 갑질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누구나 반대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상대를 이해하기 힘들기에 역지사지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드라마 <레이스>는 내가 현직에서 경험한 십 수년을 현실적으로 그린 드라마였다. 여운이 많이 남았다. 과거를 떠올리며 여러 갈래로 이어지는 깨달음도 얻었다. 출신 성분보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과 자신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 세상에 옳은 갑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경험은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깨달음까지.
주인공 박윤조 대리는 '대차게 말아먹어도 환불도 안 되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직장생활은 결국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경주와 같다는 말 아닐까. 사소한 것들에 휘둘릴 필요 없다는 나름의 조언으로 들렸다.
"명확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험난한 길에서도 앞으로 나아가지만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은 순탄한 길에서도 머뭇거린다."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의 말이다. 별 볼 일 없던 나의 명확한 목적은 '뒤처지지 말자'였다.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은 길을 걸었기에 쉽게 쓰러지지 않았고, 스스로 당당하고 행복할 기회를 찾고자 노력했다. 덕분에 환불 없는 직장생활 20년을 향해 달릴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드라마 감상을 마치며 잠시 내려 놓았던 젊은 시절의 열정과 패기를 다시금 소환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