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드id Apr 26. 2024

고1 딸의 기가 막힌 첫 당근 고객

"소소한 즐거움 가득한 날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딸아이가 지난주 첫 당근 거래를 시도했습니다. 용돈이 부족하다며 사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니트를 당근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연락이 안 온다며 시무룩하다가 화들짝 놀라 제게 물었습니다.


"3일 전에 3명이나 연락이 왔어요. 지금 답해도 될까요?"

"지금도 살 생각 있는지 물어보고 산다면 팔아."


딸아이는 처음 연락한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GS25 택배로 보내달래요. 반값 택배로요. 한 번도 안 보내봤는데."

"반값 택배는 뭐야? 번거롭다. 그냥 어렵다고 얘기하고 거절해."

"보낼 줄 모른다고 하니까. 보내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보내줬어요. 유튜브 링크까지."


딸내미가 캡처해서 보내준 걸 보니 이렇게 친절한 당근인이 있을까 싶을 만큼 정성스러운 답변이었습니다. 차근차근 누군가를 가르치는 모습이랄까요. (역시 ㅋ)


택배 요청이라 이름과 전화번호도 있었습니다. 이름이 낯설지 않아 다시 보니 딸아이 중2 때 담임 이름과 같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 이름이랑 똑같네."

"그러니까요."(음)

"곧 시험인데 이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예쁘게 거절해."

"네, "


방으로 들어갔던 딸아이가 깔깔거리며 후다닥 뛰어나왔습니다.


"아빠! 선생님 맞아요!"

"진짜?"


딸아이가 혹시나 하고 전화번호를 확인했더니 선생님 번호였다고. 딸아이는 신기하다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딸아이와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내일 이거 선생님 가져다 드려!" (물론 농담입니다)


딸내미 담임이 아들 영어 선생님이었거든요. 아들도 신기하다며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거 보내드려야겠다. 너 선생님이랑 사이 안 좋았으니까. 아빠 이름으로 보내자. 내일 아빠가 보낼게."



빈 박스에 옷을 정성스레 포장했습니다. 다음날에는 하루종일 바빠 퇴근길 동네에서 보내려고 하는데 마침 학원 다녀오던 딸아이를 만났습니다. 함께 편의점에 들러 제 이름으로 택배를 보냈습니다.


받는 사람: OOO 선생님


이렇게 적어서요. 딸이 송장번호를 찍어 보내고 당근 택배 프로젝트를 마무리지었습니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께 당근 택배를 보낸 다음 날 딸은 고등학교 중간고사 영어 시험을 보았답니다.


시험이 끝났을 무렵 딸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돈은 받았어?"

"아, 돈 받을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께 선물로 드리려고?"

"아빠 계좌로 받을게요."


시험 기간에 당근과 택배라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즐거운 추억을 하나 더 추가했네요.


구르는 낙엽만 봐도 깔깔대는 여고생 딸아이는 중2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와 메시지로 당근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웃었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십 명이 엎드려 자는 씁쓸한 교실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