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참 많다. 건강을 생각해 술을 안 마시는 사람도 꽤 있다. 헌데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 흔치 않은 사람 중 하나다. 나는 술이 딱 한 잔만 들어가도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진다. 대학교 1학년 첫 술자리에서 소주 두 잔(당시에는 25도의 두꺼비였다)을 마시고 친구들이 집까지 데려다준 경험이 있다. 그 뒤로 술이 안 받는 것을 알고 술을 멀리했다. 집안 대대로 알코올 분해 효소가 부족해 부모님과 누나는 술을 전혀 못 마시고, 그나마 나는 조금 마시는 편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안 마시면 그만이었지만, 사회에서는 많이 달랐다. 지금도 역시 술을 잘 마시진 못하지만 술을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던 신입 때는 술 때문에 늘 고달팠다.
직장생활에서 술자리를 빼놓을 수 없다. 승진 축하 회식, 위로 회식, 팀회식, 부문 회식, 동기모임, 송별회, 환영회, 망년회, 접대 등 365일 내내 만들어도 될 만큼 수많은 술자리가 있다. 입사 초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좋은데, 술을 잘 못 마셔 늘 근심 걱정을 동반하곤 했다. 그런데 남자의 자존심이 뭔지 동기들은 다 잘 마시는 술을 나만 못 마신다는 말은 듣기가 싫었다. 그래서 항상 ‘술은 정신력’이라는 말로 술에 도전하곤 했다. 일단은 다 받아 마셨다.
신입사원 환영식 때였다. 회사의 전통 음주문화인 폭탄주를 처음 경험했다. 처음 세 잔은 기본으로 완샷 그리고 돌아가면서 반갑다고 따라주는 술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한계가 느껴졌다. 살며시 화장실로 가서 내 안에 있는 술들을 변기에 충분히 따라주고 나왔다. 하지만 난생처음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비틀비틀 거리며 택시를 잡아 탔다. 어지러워 잠은 안 오고 속에서 자꾸 올라왔다. 동부간선 도로 주행 중이라 세워달랄 겨를도 없었다. 결국 가방을 열고 쏟았다. 다음날 플라스틱 파일 케이스를 들고 출근했다. ‘그래도 나 환영해 준 거잖아…’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입사하고 얼마 안 돼서 선배 두 명과 짧은 시간에 찐하게 마셨다. 얼굴이 빨개서 좀 창피했지만 이른 시간이라 전철을 탔다. 그런데 급하게 마시고, 갑자기 따듯한 곳에 들어와서 그런지 속이 안 좋았다. 청량리 역에 도착하기 약 30초 전쯤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속으로 외쳤지만, 기다려주지 않았다. 열차와 열차 사이 중간 지점에 들어가서 가방에 쏟아내자 마자 열차는 역에 도착했다. 도망치듯 내려서 밖으로 나와 가방을 버리고 택시를 탔다.
버스에서도 가방 사건이 한 번 있었고, 택시를 타고 가다가 오바이트를 하려고 잠깐 내렸는데, 택시가 도망간 적도 있다.
다 신입사원 때 겪은 일이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몇 번 겪은 후 다신 술을 마시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기도 했지만, 업무상 술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험한 전쟁터에서 생존을 위한 나만의 술자리 생존 노하우를 개발했다.
알코올 분해효소 부족한 직장인 술자리 생존 전략
첫째, 빈속에 술 안 넣기
술자리 가기 전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다. 설령 한우를 먹으러 간다 해도 사발면, 삼각 김밥이나 초콜릿(폴리페놀 성분이 알코올 흡수를 막아줌) 등으로 속을 채운다. 어차피 고기도 나오기 전에 폭탄주를 들이켜야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
둘째, 사전에 숙취 해소 음료 마시기
검증되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위로가 된다. '어제 마셨으니까 좀 괜찮을 거야'라는? 음주 전 꿀물(과당성분이 알코올 분해 작용을 도움), 율무차(간과 위를 보호하고, 알코올 배출을 도움) 등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셋째, 일단 마시고 오바이트 하기
어려운 술자리, 술을 거절할 수 없는 자리에 필요하다. 소주보다는 폭탄주를 마실 때 좋다. 오바이트를 하면 천천히 깬다. 이후부터는 전략적으로 안 마시는 거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나중에는 다들 취해서 안 마셔도 잘 모른다. 단, 오바이트는 역류성 식도염의 잔재를 남긴다.
넷째, 물 많이 마시기
알코올 분해 효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알코올을 중화시키기 위해 물을 많이 마신다. 맥주보다는 소주 마실 때 추천. 화장실 들락거리는 게 좀 귀찮기는 해도 술 깨는 데는 좋다.
술은 마시면 는다고 한다. 하지만 알코올 분해 효소가 천성적으로 적은 사람에게는 독이 된다고 한다. 나 역시 줄기차게 마시다 보니 어느새 주량이 많이 늘었다. 이제는 아마추어처럼 가방을 버리는 일은 더 이상 없다. 그리고 세월도 참 많이도 흘렀다. 조직문화도 술자리 문화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많이 바뀌어 가고 있다. 요즘은 무조건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도, 못 마시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는 문화도 많지 않다. 이제는 세월도 그리고 연륜도 쌓인 만큼 술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알코올 흡입에도 얼굴색 안 변하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참 부럽다.
직장생활 11년 차 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나타났다. 바로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 세월을 잠시 되돌려 보니, 입사 전 술도 안 마시던 20대 시절에 위염, 미란성 장염, 십이지장염, 식도염 등 5가지의 위내시경 결과를 받은 적이 있다. 원인은 바로 취업 스트레스였다. 졸업 후 취업과 유학을 준비했던 시간이었다. 술은 몸을 망치지만, 스트레스는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까지 피폐하게 한다. 고로 직장인들은 스트레스 생존전략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