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첫 스파링...지방간 탈출보다 값진 변화

살기 위해 시작한 복싱, 중년에게 필요한 건 속도가 아닌 버티는 마음

by 이드id


직장인이 퇴근 후 운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야근과 회식, 누적된 피로는 많은 직장인의 면죄부로 작용하곤 합니다. '피곤한데, 내일부터...'라고 미루는 일이 다반사죠. 특히 40대 중반을 넘어서는 중년이 되면 체력은 눈에 띄게 떨어지고, 운동을 시작할 여유도 의욕도 점점 줄어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스나 복싱, 러닝 같은 운동에 도전하는 중년 직장인도 많습니다. 마라톤을 즐기는 임원과 직장 동료, 헬스에 진심인 친구, 저와 같은 복싱장에 다니는 중년의 관원들. 같은 중년 입장에서 볼 때, 체력 관리뿐만 아니라, 무너져가는 건강과 자신감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 살기 위해 찾은 복싱장, 중년의 자신감 회복하는 중입니다]


지난해 9월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라며 복싱장 관장님께 구박받던 3개월 차 중년의 초보 복서 이야기를 기사로 전한 적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 나이에 되겠나' 싶었는데, 10개월이 지난 지금 제 마음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야근과 피로라는 면죄부를 진작에 던져버리고 꾸준히 버틴 시간이 만들어낸 변화입니다.


처음 복싱을 시작할 때만 해도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축 늘어지는 몸과 더불어 바닥난 체력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려 보자는 생각 하나였습니다. 막상 시작해 보니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쉽게 하는 기본 동작조차 생각대로 되지 않았고, 관장님 지적은 거침없었습니다.


동작과 자세가 틀렸다는 말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됐습니다. 운동을 하러 갔다기보다, 제 부족함을 매일 확인하러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내 연습이 아직 부족해서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야근, 회식이 없거나 아프지 않으면 무조건 복싱장에 나갔습니다.


변화는 있었지만, 확신은 여전히 없었습니다


6개월이 지나자 몸에는 분명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십여 년 넘게 지방간 위험군에 가깝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재작년 말에는 중증을 넘어섰으니, 운동을 꼭 하라는 경고도 받았습니다. 작년 말 건강검진 결과는 '지방간 미미'였습니다. 복싱장에서 다양한 운동을 꾸준히 하다 보니 체형도 달라졌습니다. 아이들도 아빠의 달라진 배를 알아볼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복싱에 대한 자신감은 쉽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다녀도 실력이 늘었다는 확신은 없고, '여전히 나는 못한다'라는 생각이 따라다녔습니다. 시간과 노력은 쌓였지만,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관장님의 지적도 여전했고요.


변화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3월 초, 복싱 경력 10년이 훌쩍 넘는 50대 관원 한 분이 스파링 연습을 권했습니다. 혼자 샌드백만 치던 사람에게 스파링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습니다. 누군가와 마주 서는 순간,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가요? 실력이 안 돼서 못 해요. 관장님 보시면 연습이나 하라고 한 소리 하실 걸요."

"링 말고, 그냥 여기서 살살 해봐요."


처음으로 누군가를 상대로 연습을 해봤습니다. 며칠 뒤 관장님이 스파링을 해보라고 했고, 마우스피스까지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회사 끝나고 늦게 복싱장에 가니 스파링 할 시간도 상대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1~2주가 지났고, 까맣게 잊고 지내던 3월 19일, 마음에 준비도 못 한 채 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스파링.jpg 복싱 대회에 나간 아들(좌)의 모습을 본 후, 나이 49살에 복싱을 시작했습니다


상대는 10년 이상 복싱을 하신 베테랑 관원이었습니다. 3분씩 2라운드였습니다. 3분이 이렇게 긴 시간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첫 라운드에서 이미 체력을 거의 소진했고, 두 번째 라운드에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못 하겠다'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고, 그만해야지 확신하던 순간.


"처음에는 보통 1라운드에서 나가떨어지는데, 체력 좋네요."


상대의 이 말 한 마디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복싱은 상대와 싸우는 운동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작은 도전이었지만, 끝까지 버텨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스파링이 끝난 뒤 주변에서 들은 말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지적이 많던 관장님이 예상과는 달리 칭찬과 격려를 해줬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부족하다는 말만 들으며 버텨왔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못한다고 지적 받던 날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칭찬 들을 일이 많지 않은 나이에 듣는 기분 좋은 한 마디는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복싱장에서 건네는 동료 관원들의 응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사에서 푸념을 나누는 동료들과의 결속처럼, 작은 응원의 말이 버틸 힘이 되었습니다.


"복싱하는 사람들은 스파링을 하면 한 단계 성장한다고 하더라고요."


탈의실에서 한 관원이 한 말입니다. 3월 23일 치른 두 번째 스파링에서는 많이 맞았습니다. 헤드기어가 여러 번 돌아갈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멈추고 싶지 않았습니다. 힘들지만, 버티고 있는 제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습니다.


스파링을 경험한 이후, 스스로를 바라보는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잘해서가 아니라, 버텨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했으니까요.


중년에게 필요한 건 속도가 아닌 버티는 마음


복싱장.jpg


누구는 3개월 만에 스파링을 하고, 누구는 6개월 만에 링에 오릅니다. 하지만 중년인 저에게 그 시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늦었는지 빠른지보다, 하루하루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버티면서 스스로 하나의 산을 넘었다는 사실이 더 큰 의미니까요.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끝까지 버텨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 자신을 다시 믿을 수 있게 됐습니다.


20대 때 쿵후를 배운 적 있습니다. 도장에서 격투기 비슷한 것도 해보고, 겨루기하다가 손가락도 빠져보고, 백 덤블링 연습하다 허리도 다쳐보고, 다리도 일자로 찢고, 쉼 없이 줄넘기도 해봤습니다. 그때는 성취감 같은 걸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이 50에 운동을 하며 느낀 성취감이 훨씬 컸습니다.


중년이 되면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점점 보수적으로 바뀝니다. 늙었기에 예전보다 느려졌고, 지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도전을 피하게 됩니다. 회사에서는 성과로 평가받고, 일상에서는 체력으로 한계를 느끼다 보니 '이 나이에 이 정도면 됐다'라는 타협이 자연스러워집니다.


하지만 그 타협이 몸보다 먼저 마음을 무너뜨렸던 것 같습니다. 복싱장에서의 경험은 단순한 운동 이상의 의미를 남겼습니다. 스스로를 낮게 평가해 왔던 기준이 흔들렸습니다. 누군가와 마주 서고, 끝까지 버티는 과정을 통해 "아직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다시 찾았습니다. 또한 마음가짐에 따라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숫자로 측정되는 기록이나 체중 변화와는 다른 자신을 다시 신뢰하게 되는, 수업료보다 훨씬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중년에게 체력은 단순한 건강 관리가 아닙니다. 업무를 버티기 위한, 가족을 책임지는 힘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지탱하는 마지막 기반이기도 합니다. 중년의 몸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덩달아 마음까지 쳐져 도전을 멈춰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쉽게 무너지는 지금이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시 끌어올릴 계기가 필요한 시기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는 경험과 성취가 아닐까요.


단 한 번이라도 이러한 경험을 해본 사람은 알게 될 것입니다. 중년이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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