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비기 (플레이어의 시점)

by LifeRpg

회사 생활이 괴로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 먼저 아바타의 정보창을 열어보자.

게임 속 캐릭터 상태를 보면 꽤 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직업, 나이, 신체 능력, 재산,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피곤함이라는 감정.


우리는 이 정보창에 적힌 내용들이 곧 나라고 믿는다. 나는 10년 차 과장이다. 나는 우울한 사람이다. 나는 ~~이다.


하지만 이 정보의 내용들은 고정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직업은 바뀔 수 있다. 감정은 수시로 달라진다.

만약 나라는 존재가 이러한 내용 자체라면 나는 매 순간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신입 사원 때의 나와 팀장이 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레벨 1이었던 신입 시절의 나와 레벨 30이 된 지금의 나는 몸도 생각도 스탯도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나라는 감각만큼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어릴 때 사탕을 먹으며 달콤함을 느끼던 그 존재가 지금 쓴 커피를 마시며 씁쓸함을 느끼는 그 존재와 동일하다. 경험의 내용은 달라졌지만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느끼는 '주체'는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그 변하지 않는 '나' 이것을 '배경자아(=알아차림)'라 부른다. (김주환 교수의 저서 『내면소통』등에서 소개된 개념)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줄곧 언급해온 플레이어의 정체다.


플레이어는 정보창에 적힌 내용이 아니다. 그 모든 내용을 담고 비추는 공간이자 알아차림이다.

우리가 회사에서 고통받는 이유는 진정한 나는 배경자아(알아차림, 경험의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정보창 속의 내용과 나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우울함이라는 감정이 찾아왔을 뿐인데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며 감정과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실수라는 이벤트가 발생했을 뿐인데 나는 패배자라며 나를 실패와 융합해버린다.


일을 게임화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나의 정체성을 아바타의 내용이 아닌 플레이어의 시점인 알아차림으로 옮기는 것이다. 상사의 고함 소리도 나의 위축되는 마음도 모니터 속의 복잡한 엑셀 파일도 전부 내 알아차림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러면 나의 정체성을 아바타의 내용이 아닌 플레이어의 시점인 알아차림으로 옮기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어떤 굉장한 수련을 해서 획득해야 하는 퀘스트 보상 아이템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단 한 순간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우리의 유일하고 근본적인 바탕이다. 우리가 생각과 감정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것이 늘 배경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이것을 다시 확인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업무를 하다가 혹은 상사에게 깨진 후에 혹은 아무 때나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지금 여기에 알아차림이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사무실의 여러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모니터의 불빛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심지어 불안해하는 내 마음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모든 봄 들음 느낌을 전부 알아차리고 있는 무언가가 이미 항상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진짜 나다.


새로운 스킬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미 환하게 켜져 있는 당신의 본래 모습을 아 여기 있었구나 하고 친절하게 알아봐 주는 것뿐이다.


당신은 김대리가 아니다. 당신은 그 김대리가 울고 웃고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비추고 있는 알아차림이다.


이 시점에 머무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아바타의 내용에 휘둘리지 않고 이 게임을 진정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더 깊은 이야기


이 단계가 깊어지면 우리는 한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바타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법을 한번 살펴보자.


컵의 하얀색을 본다.

커피의 쓴맛을 느낀다.

커피가 식었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쓴맛이라는 감각과 그 쓴맛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분리되어 있을까? 아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쓴맛은 존재할 수 없다. 쓴맛이라는 경험 자체가 알아차림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봄이라는 경험도 들음이라는 경험도 어떤 생각조차도 알아차림이라는 빛이 있어야만 드러날 수 있다.


나와 세상, 아바타와 플레이어, 쓴 커피와 그것을 마시는 나, 이 모든 것이 알아차림이라는 바탕 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저것은 벽이고, 나는 벽이 아니다라고 나누는 분별적인 알아차림을 사용해 왔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하나의 알아차림이라는 기능 안에서 부분적인 알아차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옛사람들은 범아일여(세상과 나의 본질이 같음)나 불이(둘이 아님) 등으로 표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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