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만보 걷기
효율적인 시간 관리에 예민하다. 언제부터인가? 물론 아기를 낳고 나서. 매일 같이 수유 시간을 계산하고, 분유병 씻을 시간을 계산하고, 물을 끓였다가 식힐 시간을 계산했다. 목욕시킬 시간과 책 읽어 줄 시간을 계산하고, 언제 수면 의식을 시작하고 언제 끝내서 언제 아이들 방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계산했다. 이 계산이 얼마나 정확하느냐에 따라 하루가 보람차게 마무리되기도 했고, 지옥문이 열리기도 했다.
이 계산하는 버릇은 아이들이 기관에 다니고 나서도 이어졌다. 아침 식사를 준비할 시간과 깨울 시간을 계산하고, 양치와 세수를 시킬 시간을 계산했다. 그 사이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걷어올 시간을 계산했고, 설거지는 등원하기 전에 할지, 집에 돌아와서 하는 게 나을지 계산했다.
학부모가 되니까 계산은 더욱 복잡해졌다. 텔레비전 하나도 그냥 켜줄 수 없었다. 하나의 공부를 봐주는 동안 나머지 둘의 관심을 어디로 돌릴지 계산해서 미디어 노출 시간을 조정했다. 뽀로로는 나의 가장 성실한 육아 파트너지만 그렇다고 하루에 몇 시간씩 신세를 질 순 없었다. 가장 효과적인 타이밍에 투입해야 한다. 시간 관리란 선 위에서 하는 게 아니라 퍼즐처럼 조각을 맞추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밥 하는 동안 텔레비전을 틀어주고, 둘째가 공부할 때 쉬는 시간일 첫째랑 막내를 놀게 하고……. 나와 아이 셋의 시간의 아귀가 잘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하루가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시간에 예민하게 만들었는가. 아이들에게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만들어주고 싶은 욕망? 아니다. 나는 그냥 내 시간이 필요했다. 나만의 시간. 나 혼자만의 시간. 나와 아이들의 시간 조각이 딱 맞아떨어졌을 때만 보너스처럼 손에 넣을 수 있는 그거 말이다.
그 보상을 얻기 위해 세탁기 시작 버튼을 누르자마자 부엌을 정리하고, 바닥 청소를 하며 입으로는 아이들에게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잔소리를 퍼붓는다.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오늘 치울 것, 매일 닦을 곳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하고 돌아서면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빨래 종료음의 부름에 응한다. 세탁기 속 젖은 빨래를 탈탈 털어서 묵은 냄새 풍기기 전에 밖에 내다 넌다.
산만한 시간들을 긁어모아서 꼭꼭 짜내야 참기름 같은 내 시간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나온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밤이 되어야 그런 시간을 영접할 수 있었다. 각자 다니는 곳이 생긴 지금은 오전에 그 시간이 온다. 아니, 알아서 오진 않는다. 애써 오게 할 수 있다. 막내가 유치원에 갔다 오는 다섯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아침 여섯 시 반부터 등원하는 여덟 시 사십 분까지, 팬에 달달 볶이는 깨처럼 정신없이 움직인다.
막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오면 거짓말 같은 정적이 나를 맞이한다.* 이런 시간에는 불도 켜지 않는다.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서서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고, 손을 씻고, 실내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은총 같은 어둠이 깔린 조용한 집에서 효율적인 시간 관리의 속박과 일상과 루틴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체감하기 위한 의식을 시작한다.
커피를 내리는 것이다.
이때 커피는 믹스커피는 물론 아니고, 커피 메이커로 내린 것도 아니다. 핸드드립이다. 원두를 가는 것부터 시작하는 느릿느릿한 작업. 뜨거운 물로 필터를 적신 후 방금 간 원두를 드리퍼 안에 담는다. 주전자를 채운 새로 끓인 물을 원두 가루 위에 조르르 붓자 몽실몽실 솟아오르는 원두만큼 즐거움도 솟아난다. 이제 잠깐 기다린다. 커피 방울이 컵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주전자에 남은 물을 천천히 부어서 한 잔의 커피를 만들어낸다. 물줄기로 달팽이 모양을 그리며 마음과 몸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제 한숨 돌려도 된다고. 한껏 열받은 깨처럼 통통 튀어야 하는 시간이 잠깐 멈추었다고.
그렇게 내린 커피를 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이제 내 시간이다.
*사실 요즘은 재택근무 중인 회사원이 있어서 고요하지 않은 날도 많지만 문학적 허용인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