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산부인과는 모유수유 권장 병원이었다. 배 갈라 아이를 낳고 몇시간 지나서 간호사가 나타나 나의 가슴을 확인했다. 출산한 것치고 많이 부풀지 않은 가슴을 걱정하더니 이내 젖꼭지를 확 비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모유가 나오는 길을 터야 한다나 어쨌다나. 악! 소리와 함께 한줄기 모유가 터져 나왔지만 나는 기쁘지 않았다. 아이 낳기 위해 했던 제모보다 더 치욕적이었다.
제왕절개 수술한 배가 아파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해 아이를 보러 가지 못하고 하루를 꼬박 계속 누워만 있었다. 간호사는 몇시간마다 나타나 나의 모유수유 여부를 확인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엄마보다는 늘 아이가 우선이라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사나흘 지나 산부인과 부속 산후조리원에 입소를 했다. 산후조리원에서부터 모유가 시원치 않게 나왔다. 모유수유를 할 때보다 분유수유를 할 때가 많았다. 모유수유든 분유수유든 전화가 오면 달려가야 했다. 밤 12시부터 오전 6시까지는 잠을 좀 자고 싶어 수유콜을 하지 말아달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지만 교대 근무하는 간호사들은 전화를 계속 했다. 어떤 간호사는 왜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냐며 아이는 밤낮이 없다고 와서 수유를 하라며 강권하기도 했다. 결국 밤에도 자지 못하고 낮에도 수유콜에 불려다니며 육아 지옥에 진입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갑자기 잠을 자지 않았다. 이론상 아이는 15일 즈음이 지나면 엄마로부터 받은 멜라토닌을 다 쓰고 자주 깬다고 한다. 나도 그냥 아이가 그런 줄 알았다. 병원에 접종을 위해 데려갔을때도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그저 아이가 호흡기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것이라고 조금 기다리는 핀잔만 들어야했다.
평일에는 신랑이 집에 없어서 산후도우미가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서 밤에 아이를 케어했어야 했다. 사나흘을 잠 한 숨을 못자니 아이도 나도 지쳤다. 결국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다. 기관지염이었다. 아이가 너무 어려 호흡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 인큐베이터에 넣고 돌아왔다.
하루에 한 번 찾아가서 아이에게 유축기로 짠 부족한 모유를 전해줄 수 있었고 그 시간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원래도 잘 나오지 않던 모유는 아이가 젖을 물리지 않으니 급격히 줄었고 많이 늘어 60ML까지 나왔던 모유가 결국은 30ML까지 줄어들었다. 그래도 그것이라도 전해주고 싶었던 나는 늘 전달해주고 왔는데...... 간호사가 했던 말이 비수가 되어 마음에 꽂혔다.
"이렇게 적은 양은 그냥 안 주셔도 되는데..."
나는 조금 별난 엄마가 된 듯해서 머쓱했다.
아이는 한 일주일 있다가 호흡이 좋아져서 퇴원을 했고 시어머님이 오셔서 산바라지는 해주셨다. 일련의 일들로 몸과 마음이 한껏 지쳐있었고 밥은 모래알처럼 씹혔고 모유도 끊겼다. 어머님은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자지 못하는 며느리를 안타깝게 보시면서도 아이가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해 면역력이 제대로 형성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루에 서너번은 하셨다.
어느 날 시어머님이 밥을 먹기 싫다는 내게 한마디 하셨다.
"아니... 밥을 먹어야 모유가 나오고 그래야 아이가 건강해지지."
어머니의 걱정에 며느리는 포함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이를 위해 먹고 마셔야 하는 엄마가 되어서 슬펐다. 어머님의 눈빛은 서서히 걱정에서 약간의 원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이가 피부가 안 좋아도 기침을 조금해도 그것은 다 모유가 부족한 탓이 되었다. 산후우울증에 허우적 거리던 나는 심지어는 아이를 덜 사랑하는 엄마가 된 것 같아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모유의 양이 곧 모성애의 크기인 것 같아 더 움츠러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깨달은 사실은 모유든 분유든 무엇을 먹이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양육자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살뜰한 보살핌 안에서 아이는 안정을 느끼고 사랑을 배운다. 내가 분유를 먹였지만 우리 딸은 사랑이 넘치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 지나가는 개미도 아야 할까봐 쉽게 밟지 못하는 아이로 말이다. 엄마의 모유와 아이의 성장도 커다란 상관관계가 없으며, 엄마의 모유량은 모성애로 측정되어서는 더더욱 안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