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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Nov 12. 2019

추석, 네 며느리들의 반란

열심히 일한 며느리, 제주도 여행 다녀오다

저마다 명절에 관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온 가족이 모여 정겹게 대화도 나누고 맛난 음식도 먹는 즐거운 시간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척들 얼굴 보면서 결혼, 취업, 다이어트에 관한 잔소리를 듣는 피하고 싶은 시간이다. 나 같은 며느리는 시댁에 미리 가서 음식 장만하고, 손님 치를 생각에 몇 주 전부터 명절 증후군을 경험한다. 결혼 후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절에 친정에도 못 가고 시댁 식구를 맞이했다. 친정이 멀기도 하고 시누이들이 오니 맏며느리로서 손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남편의 주장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 후 처음 십여 년 동안은 시댁 식구들이 오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특히나 힘든 건 명절 때 방문한 가족들이 자고 가는 거였다. 이불을 다 깔아주고, 가고 나면 다 빨아서 정리하고. 명절 음식 장만도 하면서 또 자고 가는 동안 먹을 반찬을 마련하는 게 큰 스트레스였다. 집안의 모든 그릇을 다 꺼냈다가 정리해서 넣었다. 내가 못하는 요리를 해야 하니 더 힘들었다. 언제나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지 두려웠는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숙박까지는 하지 않게 되었다.


점점 과감해져서 드디어 올해 사고를 쳤다. 각자의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엄마인 친구, 네 명의 여자들이 올 추석에 시댁에 가지 않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명절마다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늘 배가 아프도록 부러웠다. 어쩌면 버킷리스트였는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한 며느리, 떠나자" 컨셉으로 다녀왔다. 출발할 때부터 얼마나 신났는지 까르르 웃었다. 제주도 가면서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지금 서울은 몇 시나 되었을까?"

"여기는 추석을 어떻게 보내나?"

"우리 토요일에 귀국하는 거지?"


제주도를 거의 15년 만에 다녀왔다. 가깝지만, 오지 못한 이유가 주변 사람들이 제주도는 물가가 비싸서 제주도 갈 바엔 동남아를 가는 게 낫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동남아 여행을 간 건 아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휴가를 즐길 수 없었다. 정말 큰 결심을 했다. 제주도는 좋은 점이 참 많다. 국내 여행지이면서 비행기로 이동하니 마치 해외에 오는 기분이다. 그러면서도 편하게 우리말을 쓸 수 있다. 음식도 맛나고 생각보다 물가가 그리 비싸지 않았다. 친구 중 한 명은 연예인처럼 제주도를 일 년에 서너 번 온단다. 정말 여유가 된다면 자주 오고 싶다.


풍성한 여행을 즐기려고 각자가 듣고 싶은 별명을 정했다. "고급져", "풀향기", "사려니(사려깊은 언니)", "사랑해"라는 별명을 서로 부르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난 늘 외롭고 사랑이 고프니 "사랑해"라고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여행 내내 "사랑해"를 원 없이 들어서 행복했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여고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명절에 일하지 않고 자연으로 힐링해서 좋았다.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오름을 주로 다녔는데, 따라비(따래비) 오름은 계단이 많아서 고생했지만 내려올 때 완만한 능선 덕에 여유를 즐겼다. 물영아리 오름 역시 계단이 많았는데 간격이 촘촘해서 조금은 수월했다. 오름 정상에 숨겨진 습지는 마치 보물찾기 게임에서 처음으로 선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빼곡한 삼나무 숲은 아마존 정글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백약이 오름의 넓은 능선 길은 우리를 포근하게 보듬어주었다. 스위스에 가보진 않았지만 다녀온 고급져 친구가 스위스보다 더 좋다고 알려줬다. 사려니숲도 말로만 들어 궁금했는데 쭉쭉 뻗은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숲은 초록초록했다. 처음에 포즈를 취하기 쑥스러워하던 친구들은 함께하는 사진 찍기 놀이에 푹 빠졌다. 맛집 투어와 멋진 카페에서 바다 풍경보기는 덤이었다.


제주는 가까이에 있고, 늘 마음속으로 다녀오고 싶었는데, 실행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시간이나 돈의 문제만은 아니다. 마음의 여유가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가혹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어낸다. 우리가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좀 더 소중하게 가꾸면 어떨까? 이제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제주에 다녀올까 한다. 열심히 일한 나를 위한 보상으로, 그게 명절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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