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과삶 May 26. 2020

우리가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러셀 서양철학사》와 《철학의 역사》사이에서 

손에 꼽을 만큼 철학책을 읽었다. 사실 철학에 관심이 없었고 왜 우리 삶에 철학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철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사유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는 철학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러셀 서양철학사》 읽기 모임에 참여했다. 철학에 문외한이어서 참여를 고민했는데 안 하는 것보다는 귀동냥이라도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시작했다.


아뿔싸, 1,029페이지에 5cm 두께의 벽돌 책이었다. 역시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쨌든 약속을 지키기 위해 45일 동안 23시간을 투자하여 완독했다. 의미 파악을 하고 읽기보다는 눈으로 글자를 읽었다. 고대철학부터 근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의 철학자를 논리 분석철학자인 러셀만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비판한 책이다. 철학사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내용도 어렵고 번역도 일부 매끄럽지 못해서 철학자의 이름만이라도 큰 소리로 불러보는 데 의미를 두고 완독했다.


그런 나에게 두 번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참여하는 독서 토론 모임에서는 구성원의 투표로 함께 읽는 책을 정한다. 나는 《팩트풀니스》를 투표했으나 한 표 차이로 철학서에 양보해야 했다. 선정된 책은 《철학의 역사》였다. 왜 사람들이 철학서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러셀 서양철학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피해 가려 했으나 독서 토론의 날짜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분명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철학의 역사》를 먼저 읽었다면 철학에 애정의 불씨가 피어올라 《러셀 서양철학사》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읽었을지도 모른다.  《철학의 역사》는 《러셀 서양철학사》와 정반대의 책이었다. 사실 《러셀 서양철학사》로 씨름을 했기에 철학자 이름이 다소 익숙해서 《철학의 역사》를 술술 읽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 같은 초보에겐 그랬다.


《철학의 역사》는 그야말로 철학 입문서다. 이 책에서는 이름을 들어봄 직한 철학자 40여 명만 선별해서 소개한다. 그런 철학자를 규정짓는 챕터 제목이 흥미롭다. "질문하는 남자 소크라테스", "신의 죽음 프리드리히 니체", "언어의 마법에 빠진 루트비히 비겐슈타인" 와 같이 제목만 봐도 어떤 철학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특히나 스토아학파, 합리론, 경험론, 관념론, 공리주의, 실존주의, 실용주의, 분석철학, 과학철학, 정의론 등 용어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 이론의 연대기와 대표 철학자를 일목요연하게 연대표로 정리하여 제시했다.


이 책을 읽으며 안도감을 느낀다. 그렇다. 철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학문이다. 때로는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알려주고(에피쿠로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걱정해야 한다(스토아학파)는 인생의 지혜를 전해준다.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카뮈) 위로를 주기도 하고, 단지 삶의 방식을 논의하는 방법을 변화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사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롤스).


철학은 우리의 삶을 밝혀준다. 우리가 읽는 자기 계발서의 근본 이론은 모두 철학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철학을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다. 이제 입문서로 대략적인 방향성을 파악했으니, 관심 가는 철학자를 선택해서 각론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쓴 철학서나 해설서를 읽어봐야겠지? 아니면 입문서를 하나 더 읽어서 좀 더 익숙해져야 할까? 마음은 그렇지만 여전히 손이 쉽게 가지 않는다. 이래저래 망설이다 보면 또 다른 철학책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렇게 나의 귀차니즘을 합리화해본다.


《러셀 서양철학사》와 《철학의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