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과삶 Jun 23. 2020

아이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나 잘 키우고 있는 것 맞나요?

신간 《아이 키우며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건》의  내용 중 한 편을 매주 화요일 연재 합니다.

《아이 키우며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건》 목차


드디어 딸의 거처를 확정했습니다. 딸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삼수까지 해보았지만 결국 지방대를 가게 되었죠. 학교 다닐 때 딸에게 저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는 스스로 필요가 있을 때 하는 것이지 부모가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스스로 공부하고 싶을 때 효과가 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엄마를 졸라 한글을 배운 것도, 매일 같이 집에서 놀던 오빠가 어느 날 학교에 간다고 사라져 버린 바람에 떼를 써 한 살 먼저 학교에 입학한 것도, 다 제가 원해서였습니다. 방과 후 집에 오면 숙제를 다 하고 나서야 놀았던 것도 제 의지였죠. 전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해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공부는 늘 제일 친한 친구였고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렇게 원해서 했기 때문에 전 공부의 효과를 누린 셈입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부하길 강요하지 않았죠. '언젠가 때가 오면 스스로 하지 않을까?'라는 믿음 때문이었죠. 불행히도 둘 다 고3까지 그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재수와 삼수의 기간은 절박해서 공부를 조금이라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공부가 아이들에게 삶의 기쁨으로 다가갈지는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모든 부모가 바라는 인서울 대학에 다니는 자녀의 학부모는 저에겐 요원한 꿈이 되었습니다.


지방대는 절대 가지 않겠다던 딸의 다짐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전 공부가 적성이 아니라면 대학에 진학하기보다 원하는 분야의 기술을 쌓거나 경험을 해보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해요. 대학은 더 이상 아이들의 꿈을 펼칠 무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을 몰라서 인지 아니면 또래의 평범한 삶에 묻어가고 싶어서 인지 굳이 대학을 가고 싶어 했어요. 저는 조언만 해줄 수밖에 없죠. 부모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아이들의 삶이니까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했어요.


저 역시 제 의지에 따라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어요. 반면 서울을 동경하여 부모님의 품을 떠나고 싶어 했던 제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딸은 서울을 동경하고 저와 함께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제 품을 떠났어요. 그제야 늘 통화할 때마다 엄마가 아쉽게 했던 말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너무 멀리 있어서 챙겨 주지도 못하고… 옆에서 살면 음식도 주고 맨날 볼 텐데…”

엄마에게 준 아쉬움을 이제 딸에게 돌려받는 걸까요?


30년 전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왔던 때가 기억납니다. 가족 중 아무도 제가 서울에서 독립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죠. 먹고살기조차 힘든 때여서 부모가 자녀의 삶에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전세를 구할 돈도 없었고 집에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아 저렴한 월세방을 구했어요. 회사 근처의 아파트였습니다. 독신인 주인아줌마는 안방을 썼고, 방송국 작가 언니는 작은방을 월세로 사용했어요. 


전 부엌 옆, 따로 있는 다용도실을 개조한 방을 썼어요. 방이 좁아서 누우면 발이 맞은편 벽에 닿았죠. 그마저도 책상 밑에 다리를 넣어야 했습니다. 부엌과 욕실도 같이 사용했죠. 가장 작은방을 사용하는 그 집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로 눈치도 많이 봤어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저만의 공간이 있고 서울에 사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때와 같은 나이인 딸도 그때의 나만큼 신났습니다. 서울을 떠나 엄마와 멀어지는 것은 슬프지만, 처음으로 혼자만의 삶을 독립적인 공간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거죠. 그렇게 원했던 셀프 인테리어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카펫도 사고, 티 테이블도 장만했죠. 프로젝트로 영화도 볼 수 있게 꾸몄습니다.


딸이 이사 가는 날 용달차를 불렀는데 생각보다 짐이 많았어요. 4년 이상 살 곳으로 가는 거라 딸의 모든 짐을 다 실어 보냈습니다. 이사 당일 짐을 정리하는 데도 한참 걸렸죠. 아침 9시에 이사를 시작해서 정리하고 집에 오니 밤 8시가 넘었습니다. 필요한 가재도구와 식자재를 사느라 마트도 서너 군데나 갔어요. 몇 년 전 아들을 독립시킬 때 장가보내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딸을 시집 보내는 기분입니다.


보고 싶어서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졸업하면 엄마와 같이 살 거라고 합니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요? 저는 독립한 이후 직장 다니고 시집가다 보니 엄마와 영영 떨어졌습니다. 딸이 졸업하면 취업 준비를 할 것이고 직장도 다니고 시집도 가겠죠. 다시 서울로 온다면 같이 살 수도 있겠지만 지방에서 정착하면 더 이상 같이 살지 못할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짠해요. 품 안의 자식은 떠나면 그만입니다. 겨우 20여 년을 같이 사는 게 자식일까요?


딸이 내려간 뒷날부터 가급적 매일 전화를 합니다. 전화라도 하지 않으면 연결고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함께 살면서 부족한 시간을 보내지만,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지켜봤었죠. 이제는 떨어져 있으니 어떻게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뭘 먹는지, 하루하루는 잘 보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전화해야겠다 생각했죠. 그래야 근황을 알 수 있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대화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 더, 같이 살면서 하지 않았던 새로운 말을 시작했습니다.

“사랑해.”

왜 진작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같이 살면서 잘 표현하지 않았어요. 가끔 큰마음 먹고 한 말은 있습니다. 그마저도 잊고 많이 하지 않았죠.

“사랑스러운 내 딸, 네가 너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

이마저도 자주 하지 않았으니 할 때마다 딸도 부담스러워했어요.


이제는 “사랑해”를 전화를 마칠 때 꼭 합니다. 오히려 멀어지니 자연스럽게 말이 나옵니다. 카톡 대화에서도 “사랑해”라고 씁니다. 그러면 마지못해 하트 이모티콘을 보내주는 딸이 귀엽죠. 제가 쑥스러워 엄마에게 못하는 “사랑해”를 딸이 언젠가 저에게 자연스럽게 해주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이사 가고 일주일 정도 지나 딸이 셀프 인테리어 한 사진을 보내주었어요. 제법 아늑하고 좋아 보입니다. 이렇게 전해주고 싶어요.

“이제 다 컸구나, 우리 딸! 엄마보다 더 낫네. 엄마로부터 몸만 독립하는 게 아니라 네 삶도 온전히 독립하길 바래. 사랑한다. 보고 싶다. 내 딸.”


우리 아이에게 얼마나 자주 사랑한다고 말하나요?

우리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길 원하나요?

우리 아이가 20대가 되어 독립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http://bitly.kr/RhbCD8KSB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