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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효이재 Oct 30. 2022

3.4.2 열망의 신호 둘, 패러독스 균형(1)

스톡데일 패러독스: 애플과 아마존 케이스 스터디

life is a lie - Fabian Secon


패러독스 균형


  스톡데일 패러독스


두 회사를 통해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또다른 신호는 ‘패러독스 균형’입니다. 자신의 열망을 조직에 심는 과정에서 조직의 리더는 많은 패러독스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패러독스가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 입니다. 이 명칭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하노이 힐턴’이라는 전쟁 포로 수용소에 오랫동안 수감되었던 짐 스톡데일(Jim Stockdale)장군이 겪은 상황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스톡데일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20여차례 고문을 당하면서, 전쟁포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정해진 석방일자도 없고 심지어는 살아남아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태로 전쟁을 견디다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석방 후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물었습니다.


인터뷰어: “대체 어떻게 그 상황을 견뎌 내셨습니까?”

스톡데일: “저는 이야기의 끝에 대한 믿음을 잃은 적이 없었어요. 저는 거기서 풀려날 거라는 희망을 추호도 의심한 적 없습니다.”

인터뷰어가 다시 물었다.

인터뷰어: “그럼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스톡데일: “아, 그건 간단하지요. 낙관주의자들입니다.”

인터뷰어: “낙관주의자요? 이해가 안가는데요? 방금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스톡데일: “낙관주의자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거야’하고 말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갑니다. 그러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가지요.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스톡데일 장군이 다시 말했다.

“이건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에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 결단코 실패할 리는 없다는 믿음과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규율은 결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

 많은 기업, 조직의 리더 그리고 그에 속한 구성원은 어려움 앞에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다만 때로는 그 희망이 허황되거나 혹은 잠시 자기 자신이든 조직 구성원이든 대상의 눈을 가리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수단으로 확신과 희망을 이용합니다. 때문에 그 임계점은 매우 낮고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희망과 확신은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애플과 아마존이 창업자 개인의 미션을 기업 전체의 열망으로 조직화하고 통합(integration)할 수 있었던 결정적이유는, 회사의 부침과 성공에 관계없이 자신이 추구한 가치를 일관되게 지켜냈다는 점입니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도 그 가치를 중심에 두고 현실에 정면으로 부딪혀 왔는데 그것이 다시 조직이 가진 목적의 ‘진정성’을 조직 안팎으로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애플은 그 역사에서 ‘스톡데일 패러독스’ 균형이 무너졌을 때 리더의 순수한 열망이 오히려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는지와 균형이 잡혔을 때 어떤 강력한 효과를 가져오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줍니다. 애플은 한때 기업의 본질인 ‘이윤’보다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을 통한 인류의 진보’ 그 자체에 집중하다 못해 폭주하는 스티브 잡스가 어려운 현실을 왜곡하고 망각해 도리어 회사를 망치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퇴출했습니다.


사실 1985년의 스티브 잡스는 분명 그랬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의지와 바람에 따라 현실을 얼마든지 무시하곤 했는데 애플 직원들은 이를 영화 《스타트랙》에 나오는 대사를 빌어 ‘현실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라 불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이상과 목표, 바람을 직원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특유의 현실 왜곡을 일삼았는데 예컨대 정상적인 업무 프로세스와 속도라면 2~3년이 걸릴 일을 1년안에 하지 못하면 매우 무능력한 것이라 일갈하고 심지어 어느 순간 직원들이 정말 그렇게 여기기 시작한다든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애플 초창기를 함께한 전설적 컴퓨터 엔지니어 빌 앳킨슨은 그와 관련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언제든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의 비전을 믿도록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었던 겁니다. 자기 자신은 이미 그러한 비전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여 내면화했으니까요.”


 스티브 잡스 특유의 현실왜곡장은 적정한 수준에서는 분명 강력한 동기부여와 기적과 같은 결과를 창조하기도 했습니다. 워즈니악의 말입니다. “미래의 일과 관련해 비논리적인 비전을 품을 때 그는 현실을 왜곡하곤 하지요. 브레이크아웃 게임을 단 며칠 안에 설계할 수 있다고 저한테 거듭 강조했던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걸 저도 알았지만, 어쨌든 스티브의 주장에 끌려갔고 그걸 해냈잖아요.” 


 그러나 그의 ‘현실왜곡장’은 어느순간 선을 넘어 폭주했습니다. 스티브잡스가 시장에 선보인 퍼스널 컴퓨터 애플 I과 애플II는 컴퓨터 시장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내놓은 리사와 맥킨토시는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 받았습니다. 특히 리사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며 잡스가 호언장담 내놓은 맥킨토시는 겉으로는 화려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췄지만 결정적으로 속도가 심각하게 느렸고 조용한 컴퓨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잡스 특유의 고집으로 냉각팬이 없던 탓에 고장이 잦았고 당시 대부분의 컴퓨터에 도입된 하드드라이브 마저 장착하지 않아(플로피 디스크 1개 슬롯만 보유) 사용하기 극도로 불편했습니다. 맥킨토시는 덕분에 ‘베이지색 토스터’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맥은 처음 몇 달 동안은 잘 팔리는 듯 했지만 1년이 채 되지 않아 판매량이 급감했습니다. 1985년 3월의 매출은 예상 수치의 10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잡스는 다시한번 현실 왜곡장을 가동해 ‘혼자 씩씩대거나 복도를 배회하며’ 문제의 원인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에게 있다고 힐난을 퍼부었습니다. 매킨토시 팀의 일원이었던 조안나 호프먼(Jonna Hoffman)에 따르면 잡스의 ‘현실왜곡장’은 “추진제가 될 수도 있지만 결국 현실 자체에 일격을 당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해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퇴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 퇴출 이후 애플은 정 반대의 측면에서 ‘스톡데일 패러독스’ 불균형을 겪습니다.


 존 스컬리의 애플은 ‘기술과 인문학,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결합한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는 소비자 제품’이라는 본디의 비전을 비웃었습니다. “한마디로 (잡스의 비전은) 정신나간 계획이었다. (중략) 현실을 왜곡해 세상을 바꾸려는 꿈이나 꾸고 있을 순 없다. (중략) 첨단기술 제품은 소비자 제품으로는 설계되고 판매 될 수 없는 것이다”


 안정적인 수익을 우선시하던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들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 운영 체제를 유사하게 나마 모방하는데 수년의 시간이나 걸렸음에도 (그 사이 차별화된 혁신을 이룰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음에도) 변화에 제대로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으로 맥킨토시의 제품, 모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습니다. 불과 십년 후 컴퓨터 시장의 애플 점유율은 고작 4%에 불과했습니다. 애플은 이제 IBM, 선마이크로시스템스, HP와 같은 회사에 매각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다행스런 일은 동시간 퇴출된 잡스는 넥스트NeXT와 픽사Pixar를 거치며 비로소 현실왜곡장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감각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잡스는 넥스트NeXT라는 고성능 퍼스널 컴퓨터 회사를 창업해 자신의 현실 왜곡장을 보란듯 마음껏 펼쳤지만 실적측면에서 또한번 크게 실패합니다. 1988년 잡스의 넥스트는 뛰어난 성능을 지니긴 했지만 미처 완성되지 않은 0.9버전으로 출시되었으며, 특유의 폐쇄적인 시스템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 진영을 중심으로 호환가능한 개방형 시스템이 대세가 된 컴퓨터 시장에서 살아남기엔 매력이 떨어졌습니다.


 결정적으로 유사한 성능의 컴퓨터와 비교해 너무 비쌌습니다. 당시 넥스트가 설정한 주 고객층인 고급 교육시장-대학, 대학원-의 소비자 층은 2~3000달러 선을 기대했지만 정작 출시된 컴퓨터의 가격은 6500달러였습니다.


 수년 후 잡스는 이전의 기질과는 다른 결정을 합니다. 최상의 소프트웨어와 그에 걸맞은 하드웨어가 통합 제공되어야 한다는 엔드 투 엔드 철학을 잠시 내려놓고 하드웨어 사업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애정이 담긴 공장을 캐논에 팔고 넥스트를 소프트웨어 운영체제를 만드는 회사로 전환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스톡데일 패러독스 균형을 배우는 데는 픽사에서의 경험도 도움이 됐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조지 루카스 필름의 한 부문을 인수해 만든 픽사는 스티브 잡스의 철학과 큰 틀에서 매우 부합하는 회사였습니다. 그에게 픽사는 예술(인문)과 기술 분야의 문화를 모두 존중하는 조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픽사를 현재의 모습인 애니메이션 회사라 생각하지만 픽사는 원래 영화, 애니메이션 전문가용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통합 개발해 판매하는 사업을 주력으로 했습니다. 디지털 애니메이션 사업은 그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한 부업에 불과했습니다. 픽사에서 역시 그들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최고의 품질이었지만 수익을 안겨다 주지 못했습니다. 지속 손실을 보던 넥스트에 이어 파산 위기에 처한 픽사에 대해 스티브 잡스는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사업 중심의 비즈니스를 내려놓고 그동안 부업정도로 생각했지만 당시 디지털 애니메이션 시장 상황에서 현실적인 성장 잠재력이 높았던 ‘디지털 애니메이션’ 부문에 그의 개인 재산을 털어 투자합니다.


 역설적으로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그가 그의 생을 바쳐 순수하고 강렬히 원했던 목적인 ‘미치도록 위대한 제품(insanely great product)’과 그것을 지속해 만들어내는 문화를 가진 회사를 창조하는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넥스트의 운영체제 소프트웨어 기술은 속절없이 무너져가던 애플을 되살릴 수 있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무너져 가던 애플, 애플 이사회는 회사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를 인수하고,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CEO로 다시 복귀합니다. 애플은 넥스트의 소프트웨어 기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운영체제 개발에 성공합니다.)


 픽사는 『토이 스토리』라는 말그대로 예술과 기술이 결합한 ‘미치도록 위대한(insanely great)’ 작품으로 시장의 인정을 받았고 머지 않아 (애플로 복귀한) 스티브 잡스 없이도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작품을 생산하는 위대한 기업의 반열에 오릅니다.


 이후 애플은 스티브 잡스 특유의 ‘현실왜곡장’을 계속 발휘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균형을 잘 찾았습니다. 애플은 앙숙인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통합하는 엔드 투 엔드 전략을 고수하면서도 그 안에 열린 생태계를 구축했고(아이튠즈, iOS 어플리케이션 등), 실제 수익에 큰 영향을 미쳤던 고질적인 재고관리, 유통망 문제 등 현실적 운영 문제에 있어서도 혁신을 꾀했습니다.(스티브 잡스는 이 과정에서 팀 쿡(Tim Cook)을 만났습니다. 팀 쿡은 이후부터 애플의 이상을 현실로 최적화 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팀 쿡은 훗날 스티브 잡스를 이어 애플의 CEO가 됩니다.)


 아마존은 1995년 작은 인터넷 서점으로 출발했습니다. 온라인 소매 채널이라는 자신의 계획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가, 미디어가 없던 탓에 (베조스는 창업전 워싱턴 포스트에서 소비자 기술관련 잡지를 담당하고 있던 크레이크 스톨츠Craig Stoltz를 찾아가 사업 아이디어를 홍보했지만 그는 아이디어를 탐탁치 않게 여겨 관련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베조스는 그 신문사를 사들였습니다.) 친구들에게 입소문을 내달라고 부탁한 것 외에는 이렇다할 마케팅이나 홍보 계획도 없던 첫달에 아마존은 미국 50개 주는 물론 45개국에까지 물건을 판매했습니다.


 그럴거라 상상,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문이 밀려들다 보니 회사는 곧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아마존의 상징적인 창업 전설등 중에는 쉬운 포장 방법을 찾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장 때문에 죽을 지경이야! .. 시멘트 바닥에서 포장하는게 너무 고역이다. 우리에겐 무릎보호대가 필요해.” 어느날 베조스가 외친 한마디에 한 직원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포장 테이블이에요.” 이튿날 아마존엔 포장 테이블이 들어왔습니다. 아마존이 그토록 빨리 성장했다는 것은 사실 베조스와 동료들이 많은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베조스는 그 혼란 속에서 분명한 확신과 거대한 열망을 가졌습니다.


‘지상 최고의 고객중심 회사가 되는 것’, 곧 베조스의 목표는 세상 모든 것을 파는 가게(Everything store)를 만드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객에게 초점을 맞추던 그는 1000명의 고객에게 이메일을 보내 아마존에서 무엇을 팔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베조스가 ‘롱테일(long tail)의 개념을 더 잘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롱테일이란 일반적 히트상품/인기 상품(전체 시장의 소수, 20%)이 아닌 탓에 대부분의 소매업체에서 매대를 차지하지 못하는 제품(전체 시장의 다수, 80%)들이 히트상품/인기상품의 볼륨보다 크다는 개념으로 파레토 법칙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아마존은 무서운 속도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4년 후인 1999년, 제프베조스는 세계적인 시사 주간지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불과 1개월 후 아마존은 당시 미국의 닷컴 버블 사태를 직격탄으로 맞아 대단히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던 1999년 12월 106달러였던 아마존 주가는 한 달 뒤 40% 하락했고, 불과 2년 만에 6달러가 되었습니다. 저널리스트와 애널리스트들은 아마존을 ‘아마존닷토스트(Amazon.toast)’, ‘아마존닷밤(Amazon.bomb)이라 부르며 비웃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아마존은 닷컴 버블 여파에, 재무적 적자 폭은 지속 확대됨에도 불구하고 적자를 줄일 생각은 하지 않고 외려 투자를 확대하는 정신나간 조직이었습니다. 닷컴 붕괴의 와중에 그와 몇몇 다른 인터넷 기업가들은 《NBC 나이틀리 뉴스NBC Nightly News》에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진행자 톰 브로커Tom Brokaw가 아마존이 성장 과정에서 큰 적자를 기록 중이란 사실을 부각시키며 물었습니다. “베조스, 이윤의 철자-PROFIT-를 알고 계신가요?” 베조스가 답했다. “물론입니다. P.R.O.P.H.E.T(prophet, 예언자라는 뜻으로 이윤이란 영어 단어와 발음이 같음)이죠.” 하지만 닷컴 거품 이후 아마존은 보란듯이 살아 남았습니다. 주가하락, 적자 경영에도 불구하고 지속 투자를 꾀한 회사의 전략이 주주를 눈속임하기 위한 것이거나 창업가의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망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곧 드러났습니다.


 베조스는 그의 목적인 ‘고객’의 흐름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었고 그 흐름을 바탕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단기적 수익보다 고객 경험을 보다 혁신해 장차 거대한 시장을 장악하는 비전을 실행했을 뿐입니다. 동시에 아마존은 철저한 내부 지표관리를 통해 그 비전, 전략이 실행가능한 것임을 지속 확인해가며 나아갔습니다. 당시 주가는 113달러에서 순식간에 6달러로 떨어졌지만 한편으로는 고객 수, 단위수량당 이윤 등 내부 사업지표는 모든 것이 더 나아지고 또 빨라지는 중이었습니다. 아마존의 온라인 상거래 사업은 고정비용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존은 내부 지표를 통해 고정비용을 감당할 정도의 구매 수준만 유지되면 수익성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을거라 계산했고, 외려 지속 투자, 경험 개선을 통해 특정수준의 매출 임계점에 이르면 정해진 고정비용을 상쇄하고 폭발적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 봤습니다. 분명히 시간이 걸렸지만 아마존이 옳았습니다. 현재 아마존을 두고 ‘수익성이 없는 정신나간 기업’이라고 폄훼하는 전문가는 아무도 없습니다.


Book: 상효이재, 초개인주의 Over-Individualism, 한스미디어, 2022

장재웅, 상효이재, [네이키드 애자일] , 미래의 창,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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