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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준 Oct 21. 2022

가시

오래 전, 첫 사랑 이야기

아직도 봄꽃이 더운 바람에 짓눌릴 때면 그때가 생각나곤 한다. 그때엔 별것도 아니었던 듯 지나쳤지만 지나와 생각해보니 내 봄꽃은 그 날에 폈었다.

 

 2009년 봄, 국가적으로도 다사다난한 해였지만 나에게는 더욱 의미가 깊던 해였다. 그때의 난, 토요일이면 백일장에 나가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공모전에 낼 글을 쓰곤 했다. 문인의 꿈을 었던 것도 있겠지만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는 게 더 큰 목적이었다. 그해 봄, 5월 16일 즈음. 여느 때와 같이 나는 혼자 백일장에 나가 혼자 글을 썼다.


 그 날의 산문부 주제는 ‘햇살’이었다. 어차피 오전에는 쉬이 글이 잡히지 않으니 개략적인 이야기 구조만 짜두고 점심을 먹은 후 빠르게 쓸 계획이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의 얼개를 짜두고 밥을 먹으러 갈 때였다. “너 나 알지?” 뒤에서 작지만 앙칼진 목소리가 귀를 감았다. 혼자 온 터에 내가 아는 아이들은 글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당연히 나를 부르는 소리인 줄은 몰랐다. “야! 너 나 아냐고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나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어, 아니. 사람 잘못 본 것 같습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애 입에서 내 학교와 이름이 나왔다. “너 전번에 보니까 글 잘 쓰던데? oo대 백일장 때 상 타는 거 봤어. 그거 너 맞지?” “어…그렇긴 한데.” 뭐라 이을 말이 없었다. “밥이나 같이 먹자. 너 혼자 왔지? 나도 혼자 왔어!” 그 애 말처럼 나는 혼자 백일장을 다녀 도내에서는 심사위원들에게 ‘xx고 독립군’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때였다. 어차피 혼자 먹는 밥보단 둘이 먹는 밥이 좋을 것 같았다. “어, 그러자.” 같이 밥을 먹을 즈음에야 그 아이의 얼굴이 하나하나 눈에 박혔다. 살짝 가무잡잡한 듯 희지는 않은 얼굴에 눈은 나보다 두 세배는 커 보였고 귓불은 말려 들어가 옆으로 접혀있었다. 머리는 살짝 굴곡진 단발로 어깨 위에 걸쳐 있었다. 키는 내 가슴께 정도에 그쳐 무척 귀여운 아이였다. 반면에 나는 짧은 반삭발 머리에 덩치 있고 인상도 좋지 않은 편이었디. 지금 생각해보면 같이 서 있으면 삼촌과 조카 같았을 그런 모습이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난 후 그 아이와 이 얘기, 저 얘기를 하였다. 여태까지 살아온 이야기부터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까지. 원고 제출 시간은 3시 30분까지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그 아이와의 대화는 제쳐두고 서둘러 글을 쓰기 시작했다. 되려 그 아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쩌면 나 때문에 상을 못 탄 앙갚음을 하려는 듯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때부턴 그 아이가 하는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 순간엔 그 아이와의 대화보단 나의 입상이 더 귀했다. 눈치챘을까, 언젠가부터 그 아이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는 내게 제가 쓴 운문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흘러 모든 시구가 생생하진 않지만 한 줄이 기억에 선명히 줄 그어져 있다. ‘오늘도 나무 한 그루, 내게 말 걸어주면 좋겠다.’ 그 날 운문 주제는 ‘나무’ 였다.

 당연히 그 날은 장려상조차 타지 못했고 저녁에 친한 친구와 문자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던 중에 그 아이 말이 떠올랐다. 나는 흐릿한 말 가운데 내 속에 박혀있던 유일한 저 말을 친구에게 해주었다. 문자를 보낸 지 3분이나 지났을까. 대뜸 친구에게 전화가 와 바로 그 아이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왜 이렇게 바보 같냐는 말은 빠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밤이 그 아이와 나의 첫 번째 하루였다.


 하지만 전주에 살았던 나와 달리 그 아이는 멀리 대구에 살고 있었다. 직장을 다니는 요즘도 대구에 가기가 만만치 않은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서로 중간 지점에서 만나도 대전은 가야 하니 여자친구 얼굴 만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궁여지책으로 우리는 ‘문학소년과 문학소녀’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전국 단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에 같이 신청하여 쓰라는 글은 안 쓰고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백일장이야 대학이나 지역 축제 현장에서 열리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따로 코스를 정하지 않아도 데이트 장소는 확보된 셈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매주 백일장을 신청하였고 서로 같은 공모전에 글을 써 시상식장에서 만나는 계획도 세웠다. 물론 시상식에서의 만남은 이루어진 적이 없지만. 그 아이와는 모든 게 통했다. 글을 좋아하는 또래도 만나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귀를 기울여주고 고개를 끄덕거려주곤 했다. 처음 서로를 인지하던, 그리고 사귄 지 첫날이던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그 아이를 햇살이라 불렀고 그 아이는 나를 나무라 불렀다. 다만 그때까진 여자친구의 느낌보단 문우文友의 느낌에 가까웠다. 서로 다른 지향을 두고 만난 지 한 달 반쯤 되었을 때, 천안에서 일이 나고 말았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십여 년 전, 그때엔 천안 Y 백화점 뒤로 ‘담뱃골’이란 곳이 있었다. 말 그대로 교복 입은 어린아이들이 몰래 담배를 피우던 일종의 공터이자 해방구였다. 천안 관내에서 백일장에 참가한 뒤에,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르게 담배를 배웠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담배 피울 곳을 찾다 그곳에 발을 디뎠다. 반이나 태웠을까. 원래 그쪽에 사는 친구들인 듯 보이는 무리가 슬그머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일종의 텃세였다. “너희 어디 다니냐? 첨보는 교복인데?” “우리 여기 안 사는데?” 그 말에 무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남의 동네에서 그만 피고 얼른 가라.” 굉장히 순화하였지만, 당시에는 살벌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의 또래들이 그랬다는 게 재밌고 귀엽기만 하지만 사실 좀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혼자나 다름없었고 상대는 다섯은 넘었으니깐. 그래도 여자친구가 옆에 있다고 겁이 덜 났던 모양이다. 사소했던 언쟁은 점점 격화되었고 수소 창고에 불씨만 들여다 놓으면 폭발할 일이었다. 창고의 문을 연 건 그 아이였다. 글에 차마 나타내지는 못하지만 그 아이는 조그마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걸쭉한 욕을 하였다. 갑자기 열쇠 작은 여자아이의 대구 사투리 때문이었을까. 우리에게 시비를 건 일행은 어느샌가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런 그 아이가 대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지만, 의외라는 생각이 가장 강했다.


 그 아이를 바라보던 침묵을 깬 건 싱그러운 목소리였다. “나도” “응?” “나도 한 대 주라고.” 적잖이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이런 조그만 애가 담배라니…. “아니, 무슨 어린 애가 담배야. 그리고 너 여자잖아, 안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의 그 도끼눈이 번뜩였다. “너도 나랑 동갑이잖아, 그리고 여자는 왜 안 되는데?” 별달리 항변할 말이 없어 나도 모르게 한 대를 주자마자 그 아이가 한마디를 던졌다. “불” 그 말에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려던 내 손을 쳐내고 그 아이는 내가 피우던 담배에 제 담배를 붙여 불을 붙였다. 머리 하나 아래의 그 아이의, 그 깊고 큰 눈에 행여라도 담뱃재가 들어갈까 난 호흡도 어설펐다. 다행히 담뱃재는 들어가지 않고 담배 연기가 조금 들어갔는지 그 아이의 눈이 살짝 젖었다. 이 전까지 친구로만 생각했던 그 아이가 정말 내 사랑, 의로 느껴졌던 사랑스러움을 그때 보았다.


 여름이 깊어지자 백일장은 눈에 띄게 없어졌고 나는 그 아이를 보러 생에 처음으로 대구에 갔다. 안지랑에서 그 아이와 곱창을 먹었고 수성못을 거닐었다. 아직도 대구라는 말을 들으면 그 아이가 떠오를 정도로. 내가 대구에 간 답례인지 그 아이도 먼 전주까지 와 당시까지만 해도 호젓하던 한옥마을을 거닐고 덕진호의 다 져버린 연꽃을 보며 아쉬워했다. “내년엔 꼭 연꽃 다 필 때 와야겠다. 연꽃 핀 거 한 번도 못 봤어. 난 꽃 좋아하는데.”

 하지만 그 아이는 다음 해에 전주엘 오지 못했다. 미처 해가 다 지나가기도 전, 나와 그 아이는. 나무와 햇살은 서로의 자리를 잃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남자아이들보단 여자아이들과 더 친하다. 왜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마음속 깊은 고민도 남자친구들보단 여자친구들에게 더 잘 털어놓곤 하였다. 문제는 장거리 연애를 하던 우리에게, 정확히는 그 아이의 눈에는 좋게 보일 리 없었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런 친구들의 이름을 천사니 분신이니 낯간지러운 말로 채우곤 했다. 더군다나 한 달에 개수가 정해져 있는 문자메시지는 보통 그런 친구들과 주고받곤 하였다. 나는 그 아이와는 문자보단 전화로 목소리를 직접 듣는 걸 더 선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행동이 그 아이에겐 나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만드는 씨앗이 되었다. 나도 항상 나름대로 변명을 하곤 했지만 이미 식어가는 그 아이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가을이 지나갈 무렵. 마지막 낙엽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처음엔 그 아이가 첫사랑인지도, 나와 그렇게 잘 맞는 아이란 것도 몰랐다. 도리어 한 번 싸운 일에 서로 마음 맞추지 못하고 끝나버린 일의 책임을 스스로 그 아이에게 지우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입에선 입김이 새고 하늘에선 흰 꽃잎이 춤을 추던 때에, 문득 첫 눈 오면 같이 보자던 그 아이가 생각났다. 그 뒤로 그 아이와 함께 들었던 노래, 함께 걸었던 길, 같이 보았던 영화. 모든 게 줄줄이 그 아이로 박제되어 나를 따라다녔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연락해 봤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전부였다. 당시 유행하던 C사의 SNS도 이미 탈퇴한 후였다. 지역이 달라 서로 겹치는 친구도 없었기에 인연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곤 나도 그 아이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철없던 어린아이는 이제 직장인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기까지, 십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여자를 만나 봤지만, 기억이 따라붙는 사람은 그 아이밖에 없다. 그 뒤로 늘 후배들에게 말해주곤 한다. 여자의 첫사랑은 손가락이 잘린 것 같아서 처음에는 죽을 듯이 아파도 차차 적응된다, 다만 남자의 첫사랑은 손톱 밑에 웬 가시 하나가 박혀서 평소에는 괜찮아도 그 사람과 관련된 것을 마주할 때 쉴새 없이 아린다고.

 그 아이는 나를 나무라 부르고 나는 그 아이를 햇살이라 불렀지만, 봄 지나 더운 바람이 다시 불어오기도 전에 나무는 가시로 쪼개져 온전히 그 속에 남았다. 아직도 손톱 밑 그 아이, 나를 나무라 불러주던 그 아이의 큰 눈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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