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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채우는 것

by 단어

예진은 잠에서 눈을 뜬다. 찹찹한 바깥공기와 후끈한 이불속 공기에 정신을 못 차린다. 아 겨울이다. 아침에 쉬이 일어나기 힘든 이 노곤함과 몽롱함은 겨울에만 느낄 수 있다. 삼십 분 정도 뒤척이다 느릿느릿 이불속에서 나온다. 동윤은 이미 출근을 했고 민주는 언제나처럼 식탁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 예진은 가스레인지 위의 빨갛고 큰 냄비의 뚜껑을 연다. 오늘은 닭볶음탕이다. 어제는 소고기미역국이었고 그저께는 김치찌개였다. 매일 아침 저 빨간 냄비는 다른 음식들로 채워진다. 예진은 매일 다른 음식이 채워지는 저 냄비가 신기하기만 하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닭볶음탕을, 미역국을, 김치찌개를 만들어 내는 민주가 경이롭다. 예진이 만든다면 반나절은 걸릴 일이다. 민주가 채워놓은 빨간 냄비 속의 음식으로 예진은 배를 채운다. 민주가 만든 음식은 배만 채우는 게 아니다. 마음도 채운다. 예진은 매일 빨간 냄비를 들여다보며 배와 마음을 든든하게 만든다. 그렇게 채운 힘으로 일을 가고 사람을 만나며 글을 쓴다.

예진은 요즘 살면서 가장 나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고 싶은 것만 한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며 걷고 싶으면 걷고 쓰고 싶으면 쓴다. 그리고 자주 생각한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물론 스무 살 이후로 계속 한 고민이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라고 물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학교에 가고 연애를 하고 아프고 슬프고 그러다가 지금은 글을 쓰고 있다. 예진은 언제나 이야기가 차오르기를 기다린다. 이야기가 없이는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픈 일도 슬픈 일도 글 속에서는 하나의 글감일 뿐이다. 예진은 그게 좋다. 자신의 아픔과 슬픔에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글을 쓰며 예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 되어간다.


동윤은 이제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안다. 이제야 안다. 자신의 지난 55년이 아쉽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런 동윤은 예진과 예승을 볼 때마다 잔소리를 멈출 수 없다. 이들은 자기보다 더 잘 살았으면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진과 예승의 얼굴에는 지겨움만 피어난다. 자신이 다 겪고 나서 깨달은 것처럼 이들도 직접 겪고 부딪치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동윤은 그저 이들의 뒤에서 묵묵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동윤은 오래 살고 싶다. 오래오래 뒤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고 싶다. 이들의 돌아올 곳이 되어주고 싶다.

동윤은 요즘 오래된 친구들을 다시 자주 만난다. 이제는 말하는 시간을 줄이고 듣는 시간으로 채운다. 이제 우리의 나이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친구의 이야기가 안타까워도 조언은 입속으로 삼킨다. 이들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도 용기가 없어서, 힘이 없어서 하지 못한다. 그냥 살던 대로 산다. 동윤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는다. 그리고 함께 있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같이 술을 먹지도 못하고 담배를 한 대 피우지도 못하는 자신을 자꾸 불러주는 친구들에게 이제는 고마움을 느낀다.


민주는 앞으로의 시간은 자신을 위해 채우기로 마음먹는다. 자꾸만 빠지는 살과 약해지는 몸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건강에 좋다는 비타민과 영양제들은 일단 사본다. 그리고 동윤에게도 권한다. 혼자서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 자식들을 다 키우고 동윤과 낚시나 다니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 낚시를 다니려면 건강해야 한다. 더위와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민주는 예진과 예승의 옆에 오래 함께 있고 싶다. 예진과 예승이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될지 궁금하다. 큰딸은 글을 쓴다고 하고, 작은딸은 방송일을 하고 싶다고 하니 둘 다 범상치 않은 길을 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매일 집에서 뒹굴거리는 큰딸과 놀러 다닌다고 바쁜 작은딸이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기를 바랄 뿐이다.

민주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채운다. 걱정은 멈추고 기도를 한다. 빽도 돈도 없는 자신을 지금까지 살게 해 준 건 다 예수님 덕이다. 자신을 살게 하신 주님이 예진과 예승도 잘 살게 해 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게다가 자기보다 더 예쁘고 똑똑한 딸들이니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운 삶으로 이들을 인도하시겠는가.


빨간 냄비 속의 닭볶음탕을 예진도 먹고, 동윤도 먹고, 민주도 먹는다. 각자만의 사랑과 힘을 채운다. 예진은 예진의 자리로, 동윤은 동윤의 자리로, 민주는 민주의 자리로 향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로 하루를 가득 채운 이들은 또다시 모인다. 예진은 여전히 고민하고 동윤은 그런 예진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민주는 묵묵히 빨간 냄비 속을 채운다. 비슷한 듯 다른 하루가 매일 지나간다. 이들은 이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는 걸 모른 채로 하루를 떠나보낼 것이다.



*민주는 예진의 어머니, 동윤은 예진의 아버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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