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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얼굴들

by 단어
보고 싶은 건 늘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었다. 보고 싶은 얼굴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 얼굴들은 늘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떠올랐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사실 나를 바라봐달라는 마음에 닿아있다. 앞으론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 앞에 나를 세워두기로 했다.

엄지용 시인님의 글이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이 글을 목격한 뒤로 오래오래 마음에 남아있던 글이기도 하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 내 마음에 오래도록 머물 때는 꼭 이 문장을 찾아보곤 한다. 그러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괜찮아진다. 나 말고도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고,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다.


하루는 하늘은 파아랗고 구름은 하얗던 날씨 좋은 어느 날,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날씨가 좋아서 네가 보고 싶다. 날씨가 좋으니 우리 더 자주 보자."

날씨가 좋아서 내가 보고 싶다니 이보다 더 낭만적인 말이 어디 있을까. 날씨가 좋아서 내가 더 보고 싶다면 나는 매일매일이 오늘 같은 날씨이기를 바랄 것이다. 나에게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너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 말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그렇게 해석해 버린 탓에 나는 너를 더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사실 '보고 싶다'는 말은 하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네가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건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먼저 사랑을 말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더욱이 쉽지 않다. 너를 사랑한다고 먼저 말해버리는 일은 나의 약점을 보여주는 일. 너에게 내 진심의 진심을 다 보여주고 나는 그저 기다리는 일. 그래서 보고 싶다고 말한 뒤에는 이상하게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게 된다. 꼭 선생님의 채점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바들바들 떨며 움츠린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또 나에게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먼저 말하는 건 지는 것임을 아는데도 기꺼이 내가 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당신들이 너무 좋아서 이만큼이나 사랑한다고 자꾸자꾸 말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나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사랑을 목격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래서 그 순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면 마음이 충만해진다. 지는 일과 이기는 일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져도 진 것 같지 않고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냥 뱉어내고 본다.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재고 따지지 않고 내가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들과 보고 있어도 그리워지는 사람들, 한때는 보고 싶은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멀어져 버린 사람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리고 어떤 걸 보고 싶어 하는 걸까.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얼굴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 아니라 이미 본 얼굴들. 예전에 보았고 오늘도 보았으며 내일도 볼 얼굴들. 다 알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하나도 모르는 당신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 이 마음은 내가 쓰고 싶은 문장은 이미 다른 작가들의 탁월한 글 속에서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글을 쓰고야 마는 사람의 마음과도 비슷할 것이다. 내가 쓰지 않는 이상, 나는 아무리 읽어도 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내가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 문장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아무리 봐도 이해하지 못할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든 나를 통해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든 무엇이든 보고 싶다. 보고 있는 건 좋은 일이니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외롭지 않을 테니까. 오래오래 바라볼수록 나는 쓰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질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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