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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야기.

by 단어

나는 오늘 좋은 하루를 보냈어요. 좋은 사람을 만났고 좋은 대화를 나눴으며 좋은 밥을 먹고 좋은 노래를 들었어요. 나는 좋은 이야기가 쓰고 싶어요. 그래서 자꾸만 망설이게 돼요. 가끔은 헷갈리기도 해요. 글이 이어지는 게 어떤 거였는지. 멈추지 않고 쓰이는 이야기가 어떤 거였는지. 나는 좋은 이야기만 써요. 적어도 나에게 좋았던, 혹은 좋았을 이야기를 써요. 최근에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는 책을 읽었어요. 아니 읽고 있어요. 아직 다 읽지 못했거든요. 나에게는 힘이 드는 책이에요. 내가 보고 싶지 않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말하는 책이에요. 요즘은 생각해요.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해서 쓰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외면하려고 노력하면 사는 내내 외면 할 수 있는 걸까요? 지금의 내가 훗날 당신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우리는 함께 살아가잖아요. 내가 되었다가 당신이 되었다가 하잖아요.


오늘은 네시간 삼십 분 동안 기차를 탔어요. 앉자마자 잠들었다가 눈을 떴더니 한 시간 정도 지나있었어요.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세 시간 반이 남은 거죠. 평소 같았으면 유튜브를 틀거나 넷플릭스를 틀었겠지만, 오늘따라 속이 너무 안 좋은 거예요. 도저히 핸드폰을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냥 있었어요.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했어요. 그러면서 제일 먼저 네가 떠올랐어요. 나에게 매번 최선의 다정과 성실과 기쁨을 주는 너를 생각했어요. 그 속에서 나는 자주 기뻤어요. 자주 웃었어요. 너는 내 머리를 빗겨주고, 나는 가만히 앉아 있어요. 머리가 잔뜩 엉킨 탓에 자꾸만 빗이 중간에서 뚝뚝 멈춰요. 그러면 나는 아프다고 말해요. 너는 미안하다며 그 큰 손으로 나의 얇고 약한 머리를 살살 만져요. 몸을 이리 기울이고 저리 기울이며 엉킨 머리를 하나씩 풀어요. 나는 그저 앉아 있어요. 텔레비전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요. 절대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머리가 어느새 가지런히 빗겨 있어요. 나는 머리를 만지며 감탄을 금치 못해요. 너는 뿌듯하다는 듯이 웃어요. 그 안에 있는 나는 안전해요. 뾰족한 것 하나 없이, 어두운 것 하나 없이 밝기만 해요.


어지러운 속이 조금 진정된 것 같아 핸드폰을 켜요. 그런데 핸드폰 속 세상은 왜 이리 어지러운가요. 이쪽은 저쪽을 싫어하고 저쪽은 이쪽을 싫어하고. 속은 사람과 속인 사람, 상처를 준 사람과 상처를 받은 사람, 이 모든 것들을 비난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 작은 말 하나에도 논란이 되고 상처가 되고 뉴스가 되는 세상이에요. 더 보고 있다가는 내 속도 마음도 세상도 더 어지러워질 것만 같아 핸드폰을 그대로 덮어버려요. 아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쉬운 세상이에요. 기차 안은 한없이 조용한데, 내 옆의 사람은 조용히 유부초밥을 먹고 있고 내 뒤의 사람은 연인과 전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러면 대체 그 많은 일들은 어디서 일어나는 걸까요. 모두들 유부초밥 안에 슬픔을 숨기고 밝은 대화 안에 아픔을 숨기고 있나요. 밖으로 나오지 못한 슬픔과 아픔이 뒤엉켜 분노가 되나요. 그러면 우리 밖으로 꺼내 보는 건 어때요. 분노가 되기 전에, 걷잡을 수 없는 상처가 생기기 전에 서로를 들여다보는 건 어때요. 나와 친구는 서로 나쁜 일이 생길 때 마다 상대가 나의 문자를 확인하든 안 하든 일단 다 보내고 봐요. 나의 문자를 바로 확인하든 한 시간 뒤에 확인하든 일단 말하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거든요. 언제든 나의 문자를 확인한 친구가 그런 일이 있었냐며 수고했다고 힘들었겠다고 답할걸 알기 때문이에요. 말하고 들어주는 일만 성실하게 해내도 조금 더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우리가 슬픈 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일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오늘 좋은 하루를 보냈어요. 내일도 좋은 하루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좋은 일이 무조건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오가면서 좋은 이야기는 만들어지는 거겠죠. 하지만 좋은 하루를 보낸 나는 내일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내일은 당신의 이야기를 더 잘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하루를 보냈다면 우리 내일은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보아요. 나쁜 하루를 보냈다면 내일은 다정한 사람에게 기대어 보아요. 우리 그렇게 서로에게 조금씩 빚지고 사는 거예요.

내일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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