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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

by 단어

각자 숙제로 써 온 글 한 편을 소개한 뒤 조금의 수다가 이어지고 나면 어김없이 정적의 시간이 찾아온다. 오늘의 글을 써야 하는 시간이다. 다음 숙제로 써 올 글감만 정해도 되고 반만 적어도 되고 완성하지 않아도 되지만 스스로 정한 규칙이 있다. 글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간 안에 한편을 무조건 완성할 것. 매번 좋은 글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기에 그저 완성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끝맺음 짓는 것도 습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주시는데 그 안에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언제나 다른 학생들은 나를 보며 놀랍다는 듯이 물으신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글을 완성해요?? 나는 아직 반도 못 적었어~"

나는 그저 멋쩍다는 듯이 하하 웃고는 완성만 했지 글다운 글이 아니라고, 어디 내밀지도 못하는 글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그런 나를 빤히 보시다가 나 대신 대답해 주신다.

"예진 학생은 항상 글을 쓰니까요. 다음이 있으니까 지금 꼭 잘 쓸 필요가 없는 거지. 잘 써야 한다는 욕심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술술 한 번에 쓰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내 마음을 어떻게 아셨을까. 내가 글쓰기 수업에 등록한 이유도 '더 잘 쓰기 위해서' 보다는 '계속 쓰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보다는 오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 사람들이 뒤돌아봤을 때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고 말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오래 쓰려면 힘이 필요하다. 아무도 반응해 주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을 담담함과 계속해서 나에 대해 말할 용기와 세상을 사랑할 힘과 내가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이라는 믿음. 그리고 더 나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이 희망이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다.


어제는 하하를 만나고 왔다. 나는 하하를 만나고 오면 꼭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슬아 작가님도 다솔 작가님을 만나고 오면 글이 쓰고 싶어 진다 그랬는데 그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글에 자주 등장하는 하하. 하하는 원래 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내가 글을 쓴 이후로,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나의 글에 자신이 등장한 이후로 내 글을 꼬박꼬박 챙겨 읽는다. 종종 답변도 온다.

“작가님, 여기서 당신은 누구를 칭하는 건가요?”

“작가님, 이번 글은 좀 질투가 나서 읽다가 말았습니다.”

나를 매번 작가님이라고 불러주는 하하는 나의 친구이자, 내 글을 찾아주는 독자이자, 나의 응원자이다. 그리고 하하는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어떻게 기억하냐고? 이 이상하고도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은 김연수 작가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책에서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래를 보통 걱정한다. 앞으로 나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취업은 할 수 있을지,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지, 새로 시작하는 이 사업이 잘 될지, 건강은 나빠지지 않을지....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큰 파도를 맞닥뜨릴 때 이 걱정은 우리를 집어삼킨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처럼. 우리의 미래에는 영원히 어둠만 가득할 것처럼. 이때 김연수 작가님은 말한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미래를 기억하는 일이라고. 다시 일어나서 평범한 아침을 맞이하고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점심식사를 고민하는 그런 평범한 미래. 봄이 오면 벚꽃을 보고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그런 미래. 그런 미래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으니까. 살다 보면 그런 평범한 날은 반드시 돌아오니까. 하하는 누구보다 미래를 잘 기억하는 사람이다. 하하는 어둠보다는 빛으로, 슬픔보다는 기쁨으로 미래를 기억한다. 그리고 기대한다.

글도 사랑도 삶도 다음이 있기에 나는 계속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이 있기에 나는 기억한다. 매일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는 나. 더 나아가고 있는 나. 내일의 나는 더 좋은 이야기를 쓸 것이고, 당신들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별로인 글과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과 나빴던 삶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우리가 되기를.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매일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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