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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어 Jan 26. 2024

태생이 이야기꾼.

  "여보여보!!! ~~가 골 넣었다!!! 봐라, 내가 역전한다고 했다이가!"


 오늘도 거실에서는 아빠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늘은 수요일. 아빠의 최애 프로그램인 '골때녀'가 방영하는 날이다. 아빠는 수요일 저녁 9시가 되면 우리가 한창 보고 있는 드라마 주인공이 곤경에 빠지든, 사랑에 빠지든 그런 건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S 본부로 채널을 돌린다. 골때녀는 '골 때리는 그녀들'의 줄임말로, 여자 연예인들이 나와 팀을 이뤄 축구 경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2021년부터 지금까지 총시즌4까지 제작된 걸 보면 우리 아빠 같은 팬들이 많은 게 틀림없다. 축구보다는 볼링, 당구, 탁구를 더 잘하고 야구 경기는 챙겨봐도 축구는 평생 보지 않던 우리 아빠가 어쩌다 이 프로그램에 빠지게 되었을까.


  아빠는 경기를 보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한다. 경기를 보고 있지 않아도 아빠의 리액션으로 나는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다 알 수 있다. 웃긴 장면이 나올 때는 아하하하 하고 웃고, 선수가실수했을 때는  아이고~~하며 탄식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탄식하면서도 입은 웃고 있다. 선수들이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또 못하는 대로 아빠 눈에는 다 웃긴 것이다. 아하하하 하고 웃는 아빠의 웃음소리가 너무 아이 같아서 나와 엄마는 아빠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또 한 번 웃는다. 아빠는 경기를 보며 웃기도 하고 탄식도 하지만 해설도 한다. 엄마가 방에 있을 때면 크게 여보!! 라고 부르며 어떤 선수가 어떤 상황에서 기막힌 골을 넣었다며 설명해 주고, 엄마가 바로 옆에 있을 때도 이 선수는 원래 이걸 잘하는 선수인데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다며 아빠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엄마에게 알려준다. 사실 엄마는 누가 골을 넣었는지, 이 선수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 선수인지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최대한 같이 기뻐해 주고 집중해 준다. 아빠의 기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빠의 기쁨에 기꺼이 같이 동참한다.

 

  아빠의 해설은 골때녀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내가 알바에서 돌아오고, 엄마가 유치원에서 돌아오고,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와 셋이 저녁을 먹을 때면 본격적인 아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늘 아빠 부서에 새로운 조교가 들어왔는데 딱 니 또래더라. 나는 요즘에 학생들 보면 다 니같아서 괜히 챙겨주고 싶고 그렇다. 어찌나 긴장하던지.... 니는 어디 가서 너무 긴장하고 그러지 마라! 알고 보면 다 별거 없어~~ 큰일날 것 없다!"


  회사에서 오늘 아빠가 어떤 일을 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이래서 감사했고 이래서 뿌듯했다는 아빠의 하루 영웅담을 나와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예전에는 지루하기만 했던 아빠의 이야기가 이제는 지루하지만은 않다. 저 이야기를 하기까지 지나왔을 아빠의 시간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나는 상상도 못 할 시간들. 상상도 못 할 큰일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모든 이야기의 끝에 큰일날 것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또 어떻게 지나야 할까.

 

  아침에도 아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오늘은 어제보다 기온이 3도나 낮으니 꼭 옷을 따듯하게 입고 나가라고 말해주고, 오후부터 비가오니 우산을 챙기라고 말해준다. 아빠 덕에 나와 엄마는 따로 날씨를 살필 필요가 없다. 아빠의 일기예보를 들은 엄마는 오늘의 날씨를 나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아빠 덕에 피한 비가 여러 번이다. 아빠 말대로 오후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나는 왠지 모르게 뿌듯해진다. 우산을 펴고 길을 걸으며 다른 사람의 우산보다 내 우산이 더 큰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한다. 나는 태생이 이야기꾼이라고. 수다쟁이이자 이야기꾼인 아빠에게서 나서 자랐으니 나도 이야기꾼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아빠의 이야기 중 지루한 이야기는 있어도 틀린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서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아빠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한다. 아빠의 이야기는 결국 모두 큰일날 것 없다! 로 끝이 나니까. 아빠의 이야기대로라면 나는 작은 일도 큰일도 그저 우하하하 하고 웃고 나면 별일 없다는 듯이 다시 잘 살 수 있을 테니까. 오늘도 아빠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는 아빠의 이야기를 글로 적는다. 아빠도 모르는 사이에 아빠의 이야기는 글이 되어 영원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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