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수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다. 아니 두 개 있다. 하나는 나와 함께 10km 마라톤을 뛰는 것과 하나는 한라산을 등반하는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싶어 흘려들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강조한다. 자기는 꼭 나와 10km 마라톤을 뛰어야겠다고. 10km 마라톤에 성공하고 나면 한라산을 등반할 체력도 길러질 거라고. 한라산을 오르며 주변 경관도 구경하고, 도란도란 사는 얘기도 하면 얼마나 좋겠냐면서 나를 자꾸만 설득한다. 10분도 못 뛰는 내가 10km 마라톤은 꿈도 못 꿀 일이고 한라봉을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한라산을 등반하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본 적 없다. 금방 갔다가 마음만 먹으면 돌아올 수 있는 산책은 좋지만 마음먹어도 금방 돌아올 수 없는 등산은 싫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소원이라는데. 같이해야 의미가 있다는데. 무엇이든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너의 마음이 고마워서 일단은 수락하고 본다. 그래 마라톤도 한라산도 너와 함께라면 뭐든 못하겠나 싶다. 하지만 마음은 마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나의 현실은 10분 뛰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랜만에 서랍 구석에 처박혀 있는 레깅스와 스포츠 브라를 꺼내 입는다. 운동은 안 하는데 있을 건 다 있다. 기왕이면 헬스장 가서 멋있게 오운완도 찍고 싶지만, 나에게는 그럴 패기가 없다. 무엇보다 운동기구들을 사용하는 방법도 모른다. pt를 받으면 되지 않냐고? 20대 초반의 휴학생에게 pt는 사치이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이패드를 켠 뒤 유튜브에 들어간다. 검색창에 "땅끄부부"를 검색한다. 운동에 ㅇ도 모르는 나에게 '운'자 정도는 알려주신 감사한 분들이다. 최근 몇 년간 영상을 안 올리시다가 최근에 다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한창 다이어트에 빠져있던 중고딩 시절, 매일 보던 영상을 찾아서 클릭한다. 시작부터 우렁차게 들리는 "칼로리! 폭파!" 예전에는 듣는 것만으로도 낯간지러워서 넘겨버렸는데 이제는 좀 반갑다. 진짜로 칼로리를 폭파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활짝 웃고 있는 땅끄부부의 동작을 하나하나 따라 하다 보면 폭파되는 건 칼로리가 아니라 내 얼굴이다. 너무 힘들어서 표정은 잔뜩 찡그리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다. 위로 바짝 묶어놨던 머리는 다 헝클어져서 노비가 따로 없다. 지금 당장 추노를 찍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몰골로 방바닥 위에 철퍼덕 드러눕는다. 등으로 느껴지는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에 나는 잠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저녁을 먹고 동생과 산책을 다녀온 뒤 땅끄부부 운동을 하고 방바닥에 철퍼덕 누워있는 나. 그때도 똑같은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나의 고3은 그야말로 격동의 고3이었다. 코로나가 터졌기 때문이다. 3월 개학은 6월로 미뤄졌고, 고3도 예외 없이 그 시간 동안 집에서 공부해야 했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한창 사랑에 빠져버린 나는 동생과 매일 하루에 한 시간씩 산책했다. 동생도 나도 열심히 첫사랑이 진행 중이었던 터라 매일 산책하러 나가도 매일 새롭게 할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동생은 지금 남자 친구와 결혼 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고, 나는 내 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애절하고 힘들고 간절하다고 생각했다. 롱패딩을 입고 나갔던 우리가 패딩을 벗고, 거리에는 벚꽃이 피고 지고, 마침내 초록 잎이 보일락 말락 할 때까지 우리는 그 길을 계속 걸었다. 매일 달라지는 거리의 풍경들처럼 우리의 마음도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우리에게 코로나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가 마음속에서 계속 피어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때만큼 산책을 자주 나가지 않는다. 동생은 서울에서, 나는 부산에서 각자의 사랑을 열심히 지키고 있다. 물론 우리가 열심히 떠들어댔던 그 사랑은 둘 다 떠나보낸 지 오래다. 지금의 우리는 무엇이든 끝이 있다는 걸 안다. 슬픔도 기쁨도 아픔도 행복도. 그래서 예전만큼 떠들지 않고 산책하러 나가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그래도 나는 훗날 우리가 뛸 마라톤과 등반할 한라산을 상상하며 운동을 한다. 언젠가 우리가 함께 한라산 정상에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너의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옷을 갈아입는다.
동생과 매일 산책하러 나갔던 그 길을 지금도 매일 왔다 갔다 한다. 대부분의 날이 혼자이거나, 혁수와 전화를 하며 그 길을 지난다. 내가 혼자일 때도, 동생과 함께일 때도, 혁수와 함께일 때도, 친구와 함께일 때도 나는 그 길을 지난다. 내가 이 길을 인식하든 하지 않든 길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매번 새로운 내가 있다. 조금 더 나아진 내가 있다.
그때는 몰랐던 걸 지금은 알고, 그때는 상상도 못 했던 내가 지금 여기 서있다. 앞으로의 나는 무엇을 더 알게 될까. 어떤 나를 마주하게 될까. 기왕이면 10km 마라톤을 끝낸 뒤에, 한라산을 모두 오른 뒤에 알고 싶다. 그때가 되면 세상에는 끝이 없는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