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은 눈 뜨자마자 바다를 봤어. 아침 일찍부터 바다에는 사람이 많더라. 어젯밤에는 금방이라도 모두 쓸어버릴 것처럼 무섭게 치던 파도가 아침에는 고요하게 반짝이고 있었어. 조깅하는 사람들, 사진 찍는 연인들, 모래놀이 하는 아빠와 아이까지. 바다가 너무 환하게 빛나서 사람들은 다 그림자처럼 보였는데 그래서 더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어. 그들 눈에는 나도 또 다른 그림자 중의 하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제 아침에는 평소보다 눈이 빨리 떠졌는데, 원래였으면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잠에 들었겠지만 어제는 그럴 수 없었어. 엄마가 제주도로 가는 날이었잖아. 그래도 엄마 가기 전에 배웅은 해줘야지. 엄마 얼굴 보고 다시 자야지 하는 마음으로 거실로 나갔는데 엄마가 엄청 분주해 보이는 거야. 거실 한가운데 캐리어를 떡하니 펴놓고 삼 일 전부터 짐을 쌌으면서 아직도 준비할 게 있나 하는 마음으로 눈을 비비며 엄마를 찾았어. 엄마는 제주도에 함께 가는 친구들과 카톡을 하는 동시에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어. 건조기에서는 빨래가 다 말랐다는 소리가 띠리리하며 울리고 있었고.
나는 빨래를 개며 엄마가 짐을 다 잘 챙겼는지 이것저것 물어봤어. 엄마가 아빠 없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걱정이 되는 거야.
"엄마 약은? 베개도 챙겼어? 엄마 이 배개없으면 잠 못 자잖아. 신분증은? 신분증 있어야 비행기 탈 수 있는 거 알지? 휴대전화 충전기도 챙겼어? 이번에 새로 산 스카프는?"
엄마는 비장한 표정으로 내 질문에 하나씩 답하며 캐리어에 챙긴 짐을 다시 확인했어. 사실 어제의 문제는 엄마가 짐을 다 챙겼나 안 챙겼나가 아니었지. 비가 너무 많이 왔잖아. 그런데 실시간으로 날씨와 풍속과 비행기 표를 확인하는 엄마의 표정은 걱정하는 표정보다는 설레는 표정에 가까운 거야. 비행기가 안 떠서 제주도에 못 간다면 기차 타고 경주라도 갈 거라고. 우리 아줌마들끼리 그렇게 약속했다고 말하며 깔깔깔 웃는 엄마는 정말 아줌마 같았어. 세상의 시선은 이제 별로 생각하지 않는 아줌마. 크게 말하고 크게 웃는 아줌마. 하지만 엄마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엄마는 정말 사랑스럽다는 거야. 나도 언젠가 아줌마가 되어야 한다면 기왕 될 거 엄마 같은 아줌마가 되고 싶어. 조금 크게 말하고 크게 웃어도 결국에는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그런 아줌마. 곧 아빠에게도 전화가 왔지. 아빠도 나랑 똑같은 질문을 엄마한테 했잖아. 이거 챙겼냐, 저거 챙겼냐. 비 오는데 조심해라. 엄마는 또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까와 똑같은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고.
엄마를 배웅하고 무심결에 냉장고 문을 열었어. 나는 열자마자 낮은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어. 어떤 그릇에는 밥, 어떤 그릇에는 국이라고 일일이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고 두 개의 큰 지퍼백 속에는 아빠의 도시락이 싸여 있었어. 하나는 출근용, 하나는 낚시용. 엄마의 세심한 사랑과 걱정에 나는 또 감동하고 말았어. 나의 걱정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마의 걱정이 그 냉장고 안에 다 들어 있었던 거야. 맞아.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지. 아주 세심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지. 초등학생 때 도시락 싸서 소풍 갈 때마다 나는 어떤 게 제일 좋았는지 알아? 키친타월로 한번 감싼 후에 고무줄로 고정해 둔 작은 식기 세트. 그리고 다 쓴 수저를 담을 일회용 봉지 하나. 나는 그 키친타월과 봉지를 볼 때마다 엄마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 엄마는 내가 도시락을 꺼내서 먹는 순간과, 다 먹은 후까지 다 걱정한 거겠지.
엄마, 엄마도 제주도에서 바다를 봤어? 엄마는 바다에서 또 무엇을 봤을까. 나는 바다 앞의 사람들을 봤어. 처음에는 반짝거리는 바다만 눈에 들어오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바다와 어우러지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게 됐어.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조깅하는 사람들, 삼각대를 세워두고 사진 찍는 연인들, 모래를 보고 있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보고 있는 아빠.
엄마, 나는 아직 사람이 좋은가 봐.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이 좋은가 봐. 그건 아마 엄마 덕분이라는 생각을 해. 엄마의 딸로 살면서 사랑을 목격하는 법을 배웠어. 아주 사소한 곳에 숨어있는 사랑까지도. 바다를 보며 또 다른 바다를 보고 있을 엄마를 생각해. 사는 내내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